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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평양에 있는 동명성왕(고주몽)릉. 5세기 초에 천장한 고구려 시조 왕릉이다. |
고구려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 3성(요령·길림·흑룡강)을 아우르던 강력한 고대국가였다. 일찍부터 말 잘 타고 활쏘기에 뛰어난 기마민족의 문명을 받아들여 이웃 국가와 전쟁을 하면 백전백승이었다. 철제무기와 날렵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동쪽 낙랑·임둔군의 교통로를 끊는 등 중원에 있던 한족(漢族)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한족(韓族)이었다.
이같이 웅혼 장대한 고구려인의 기상은 시조 고주몽(高朱蒙·BC 58~BC 19)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우리 민족에게 유장한 대륙기질을 자극하고 세계제패 가능성의 원천을 제시해 주는 고주몽은 누구인가. 이쯤에서 우리는 고대사를 논하며 피해갈 수 없는 비정(比定)과 비약을 다시 만나야 한다.
지금부터 2400년을 전후해 광활한 땅 중국 동북지역에는 동부여 북부여 말갈 비류국 북옥저 행인국 등 부족 형태의 나라가 여럿 있었다. 현재의 압록강 두만강 이북 땅이다. 이중에는 고조선 말기 형성된 구려(句麗)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졸본부여라고도 불렀다. 당시 국가들은 높은 산·깊은 강을 국경으로 삼았으며 상대국이 허점만 보이면 군사를 일으켜 영토 뺏기 전쟁을 하는 게 다반사였다.
이즈음 해모수라는 북부여 왕이 사냥을 나왔다가 강가에 놀고 있는 유화(柳花·물의 신 하백의 딸)의 미모에 반해 억지로 정을 통했다. 해모수는 유화에게 “나는 하늘에 있는 천제의 아들이니 아들을 낳거든 잘 기르도록 하라”는 음성을 남긴 뒤 종적을 감춰 버렸다. 유화는 처녀가 정혼도 않고 임신을 했다 하여 태백산 남쪽 우발수 강가로 쫓겨났다.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부인 사정을 알고 궁에 데려왔다. 금와왕은 북부여 왕 해모수의 손자였다. 이후 햇빛이 유화부인을 쫓아 비치더니 마침내 다섯 되 들이 크기의 알을 낳았다. 겁이 난 금와왕이 개·돼지에게 주었으나 먹지 않았고 길가에 내버려도 소나 말이 피해갔다. 유화부인이 알을 품어 한 사내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오니 바로 고주몽이다.
사내아이는 생김새와 골격이 유별났고 영민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7살에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 신궁이었다.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했는데 사람들이 그를 주몽이라 불렀다. 당시 금와왕에겐 왕위를 이을 장남 대소(帶素) 등 일곱 왕자가 있었다. 인지(人智)가 덜 발달된 고대국가에서 권력의 장애 인물은 죽여 없애는 게 상책이었다.
이를 알아챈 유화부인이 날쌘 말을 주몽에게 내주며 “멀리 도망가 큰일을 도모하라”고 일렀다. 주몽은 오이·마리·협보 세 사람을 대동하고 동부여를 탈출해 졸본부여(구려)에 당도했다. 천운이 함께했음인가. 그곳 왕에게는 딸만 셋 있었다. 주몽의 비상함을 알아본 왕이 둘째 딸을 시집보내 세자로 삼았고 얼마 후 구려 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 해가 BC 37년으로 주몽의 나이 22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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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진구 광장동과 구의동에 걸쳐 있는 사적 제234호 아차산성. 동남쪽으로 한강을 내려다보는 고구려 산성으로 삼국시대에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
이 밖에도 고구려본기·백제본기·광개토대왕 비문·삼국유사·삼국사기·여지승람 평양조 등에 전하는 주몽 신화는 다양하나 일맥상통한다. 왕위에 오른 주몽은 본래의 성 ‘해’를 버리고 ‘높고 귀하다’는 뜻의 고(高)로 바꿔 고주몽으로 불렀다. 국호도 ‘옛 땅을 회복했다’는 고구려 말인 ‘다물(多勿)’로 개칭했다가 자신의 성을 딴 고구려로 환원했다.
원래부터 고구려인들은 하늘의 후예라는 의식이 강했는데 천제를 대신한 영웅호걸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고주몽이다. 그는 당대 유력자 연타발(계루부 족장)의 딸 소서노(召西奴)와 혼인해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영토확장에 나섰다. 소서노는 고주몽보다 8년 연상으로 이미 우태와 결혼해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을 둔 유부녀였다. 고대사는 고주몽의 이 같은 가족사를 상세히 기록해 전하고 있다.
고주몽이 왕위에 오르며 부족연맹체의 나라 구조가 중앙집권적 국가로 재편성됐다. 사학계선 고구려가 고조선 말기부터 ‘구려’ 국명으로 유지돼 오다가 고주몽에 의해 발전된 국가로 발흥됐다는 견해다. 제28대 보장왕(재위 서기 642~668) 27년 기사에도 ‘고씨는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운 지 이제 900년이 된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따라 고구려 개국연대를 BC 227년 또는 BC 217년으로 소급시키는 학자도 있다. 이런 연유로 구려를 포함한 고구려 역사가 900년이란 기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주몽은 오이·부분노·부위염 장군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인근 국가들을 공략해 흡수 병합했다. ▲말갈부족 평정 ▲행인국 정복 ▲북옥저 멸망▲비류국 송양왕을 굴복시켜 복속시키는 등 명실 공히 동북 강토의 맹주로 떠올랐다. 이때 한반도에는 동옥저 동예 마한 진한 변한이 아직 국가 형태를 갖추지 못한 채 할거하고 있었다.
BC 19년 5월. 평온하던 고구려 왕실에 갑자기 살벌한 전운이 감돌았다. 동부여에서 유화부인과 함께 살고 있던 고주몽의 첫 부인 예(禮)씨가 아들 유리 왕자를 데리고 찾아온 것이다.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할 때 이미 임신한 아들이었다. 왕은 크게 반기며 즉시 태자로 봉했다.
속이 뒤집힌 건 소서노와 두 아들이었다. 고주몽이 자신의 모든 권력기반과 재력을 바탕으로 강대국을 이뤘건만 돌아온 건 배신뿐이었다. 5개월 후 왕이 승하하자 태자가 왕위를 이으니 제2대 유리명왕이다. 이때 임금 보령 40세로 갑작스러운 죽음에 나라 안이 경악했다. 소서노가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을 불러놓고 은밀히 타일렀다.
“너희가 이곳에 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다. 속히 나와 함께 남녘으로 내려가 새 도읍을 세우도록 하자.”
세 모자는 곧바로 고구려 성을 탈출했다. 장남 비류는 미추홀(인천시)에, 차남 온조는 위례성(하남시)에 나라를 세우니 온조가 바로 백제의 시조다. 이래서 고구려와 백제는 성이 다른 이성(異姓) 간의 형제국가가 되는 것이다. 고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해 나라를 건국한 것처럼 그의 아들들도 아버지와 같은 전철을 답습한 것이다.
고주몽은 훙서한 뒤 평안남도 평양시 왕릉동에 예장되고 묘호(廟號)를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올렸다. ‘동방을 밝힌 성스러운 임금’이다. 동명왕릉으로도 불리며 지금은 갈 수 없는 북녘 땅이다. 1974년 발굴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2층 돌 기단에 사각추형의 흙무덤으로 현재 남은 왕릉 높이는 8m15㎝다. 능 규모, 축조상 특이점, 내부벽화 내용을 근거로 5세기 초 천장한 동명왕릉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 밖에도 평양에는 동명성왕을 제사지내는 숭령전(崇靈殿)이 있어 역대 임금과 관찰사들이 제향을 올렸다. 중국 요령성에도 동명성왕 신사(神祠)를 두고 무속인들이 수호제를 지내왔다.
동명성왕 등극 후 고구려 후예들은 용맹과 결집으로 한반도 북방을 통치하는 강대국으로 군림했다. 그러나 천년제국도 분열과 갈등 앞에는 힘없이 무너지는 법. ‘천년사직’ 고구려도 형제간 다툼, 군신 간 이전투구로 소국 신라에 멸망하고 마니 서기 668년 9월이었다. 이후 한반도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 밖을 넘어본 적이 없다.
국방일보 <이규원 시인·‘대한민국 명당’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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