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식사후...가욕관으로
장액에서 가욕관 가는 고속도로는 기련산맥과 나란히 뻗어 있다.
산은 바위 산이오.. 들판은 사막이다. 오아시스가 있으면 풀 나무가 있다. 물기가 있으면 풀이 있으나
그 외는황량한 풀 한포기 없는 산과 들판이다.
기련산맥과 고비사막으로 이루어진 '화서회랑'으로 달리는 것이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성은 위용이 남달라 보인다
- 가욕관- 중국 서쪽 끝 만리장성에 있는 요새이며,
처음엔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위해 세워졌다. 몽고고원이 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서
이 일대의 장성도 존재가치를 상실하게되었다.
이후 1958년 인민정부에 의해 개발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불과 30여 가구만 사는 오지로 남겨져있었다.
가욕관은 고대 실크로드의 교통요지로써 가욕관이라는 이름은 이곳이 가욕산의 산록에 위치하고있어 붙여진것이며
천하웅관이라 불리게 된 것은 웅치가 군산주봉의 사이에 있어서 그 산맥이 더 웅장해보이기때문이다.
1층은 벽돌과 목재가 혼합된 전목(塼木) 구조인 데 비하여 2층과 3층은 목재로만 지어졌
으며, 주변에 회랑(回廊)이 설치되고 붉은 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처마는 하늘로 치어올려져
있으며, 기둥과 대들보에 화려한 도안이 많이 장식되어 고풍스럽고 우아하면서도
정숙한 느낌을 준다.군사방어용으로 지은 까닭에 설계가
매우 치밀할 뿐 아니라 건축공사도 매우 엄격하게 이루어졌다.
성루의 성문과 성대, 적대(敵臺), 타구(垛口) 등은 돌을 깎아 쌓았으며,
벽면은 황토를 잘 다져서 구축하였다.
황토는 엄선하여 햇볕에 말린 뒤 가루를 곱게 내어 체로 거른 다음 찹쌀가루 등을 넣어
고루 섞어 성벽에 발랐으며, 공사가 끝난 뒤 엄격한 점검을 거쳤다.
수백 년의 풍파 속에서도 여전히 견고하고 튼튼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 이와 같이 높은 건축수준 덕분이다.
- 만리장성은 기원전 7세기(춘추전국시대)부터 축조되어 명나라때 까지 약 2,000년간 축성되었다.
길이는 25,000Km정도. 수나라때는 돈황까지,당나라때는 사마르칸트까지 영토를 넓히며 축성된 것이다.
진흙과 짚을 섞어 지형 따라 축조되었고,중요 지역에는 해자가 만들어져 있어 침공이 만만치 않게 돼있다.
그곳엔 그 옛날 사신길을 떠나는 퍼머먼스가 열리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버스로,기차로 갈 우르무치,아니 그 이상까지 낙타타고 사막길을 왕래했을 까마득한 옛날의 그들을 상상하니
눈 앞이 다 까마득해진다.
불과 며칠 밖에 안된 이 여행길도 벌써 고단해지는데...
天下雄關 (천하웅관)
가욕관관성(嘉 欲 關 關 城)
가욕관 관성은 인터체인지 북서쪽 10km 지점의 가욕산 골짜기에 위치한 관성(关城)으로서 북쪽의 흑산현벽장성(黑山懸壁長城)과
남쪽의 천하제일돈(天下第一墩)을 잇는 하서(河西)지역 제일의 요충지였다.
명나라 홍무5년(1372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했으며, 토벽으로 이루어진 내성, 벽돌을 쌓은 외성과 해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리 장성의 관성 중 가장 잘 보존 돤 것들 중 하나로 내성이 중심성이며 둘레 640m, 면적 25,000㎡, 높이 10.7m이다.
천하웅관 비석(天下雄關 碑石)은 위의 문을 통과하여 100m쯤 가면 오른쪽 비각안에 있다.
청나라때인 1809년에 숙주(肅州)의 총병(總兵)인 이연신(李廷臣)이 가욕관을 시찰하다가 그 모습이 웅장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天下雄關"이라는 4글자를 쓴 것이다. 후에 그 글자를 새겨 비로 만들어 가욕관 동관방의 길 왼편에 그 비석을 세웠는데 뒤에
가욕관 서쪽으로 166m떨어진 곳에 옮겨져 북쪽을 향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천하제일웅관이 보인다.
외성문
천하제일웅관
천하제일웅관 뒤에서...
성의 높이가 10.7m라는군요
내성의 동쪽문인 광화문은 천하제일웅관 성루 밑의 문이다.
<光化門 : 상서로운 기운이 동쪽에서 일어나 광휘가 두루 비춘다는 의미를 갖는 문>
안쪽 성벽을 따라 성위로 올라가는 비탈길..
성문을 들어선 병사가 장군에게 소식을 전할때
말을타고 단숨에 올라오기위해 한길 또한쪽은 사람이 걸어오르는계단
만리장성 성벽
만리장성을 가로 질러 가는 시커먼 물체 화물차 모습과 기련산맥
가욕관성루는 만리장성의 서쪽끝에 위치하는 관문으로 만리장성의 동쪽끝인 산해관을 '천하제일관'이라했고
이 가욕관성루를 '천하제일웅관'이라했다.
만리장성은 발해만(渤海灣)의 산해관(山海關)을 동쪽기점에서 중앙아시아 서쪽 가욕관(嘉峪關)까지 6,400㎞로 만리가 넘는다.
성벽의 높이는 불과 2m 밖에되지않는다.
이렇게 낮은 성벽으로도 적을 막을수있는 까닭은 서쪽의 유목민들은 말을 타고
식량으로 양들을 거느리고 오는데 성이 가로막혀있어 말과양이 넘지못하기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유목민들은 어려서부터 말을타는것이 생활화 되있어서
말에서 내리면 다리가 휘어있어서 뛰거나 걷는것도 잘 못한다한다.
유원문 밖에 있는 만리장성 표지석
풍화되어가는 토성
극장이였던 문창각
이곳에는 도교의 건물도 있고 관우운장을 모신 신사도 있다.
관우를 모시던 관제묘
관제묘의 관우상
문창각 천정에 태극문양..
(벽화)그림설명으로 사람들이 웃기도 했는데 잘 생각 안난다.
가욕관성루는 3중의 성벽이다.
3개의성벽이 제각이 독립되어서.. 하나의 성벽에서 다른성벽으로 옮겨 갈수없다.
만리장성이라는게 북방서역의 유목민족의 공격을 막기위해 방어시설인만큼
철저한 방어를 위해 3중으로 만들었다.
가욕관성루를 만들때 얼마나 철저하게 신경써서 만들었냐하면
책임자가 설계자에게 어느 정도의 벽돌이 필요한가를 물어
설계자는 만약을 위해 1개 의 벽돌만 여분으로 준비했는데
자위관의 완성 시에는 정확하게 1개만 벽돌이 남았다고 한다. (위사진)
그것은 오늘날에도 문서 상으로 남아 있어,
얼마나 치밀한 계획에 의해 지어졌는지를 나타내는 일화가 되고 있다.
예전부터 이곳은 서역을 오가는 도중 말이나 낙타를 갈아타고 가는 중계지점이기도 했다한다.
가욕관 성은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약 5㎞ 정도 떨어진 곳의 고비사막 안에 있다.
감숙성과 신강성을 잇는 감신공로(甘新公路)를 따라 주천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만리장성은 새로운 실크로드 길앞에서 절단되고 있었다. 물론 너무나 긴 만리장성 전부를 보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변화의 바람앞에서는 만리장성 마저도 그저 흙먼지에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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