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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lk⌒Road] 그 낯선 땅 (26) 투루판- 베제크릭 천불동

박근닷컴 2011. 9. 14. 19:26

투루판의 기후는 고온건조하며 바람이 강하다. 여름이면 보통 40-50℃를 넘나들고, 최고 기온이 49.8℃를 기록하는 등

한낮에는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로 덥다. 그 때문에 화주(火州)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가을이나 겨울에는 선선해서 여행하기가 매우 좋다고 한다.

연간 강우량이 20mm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한낮에도 그늘에 들어가면 비교적 지내기가 쉽다.

농업이 중심이고, 특산물로는 포도, 하미과, 면화 등이 있다. 인구는 약 30만.

 

 

 

베제크릭 천불동을 간다. 

고창고성과 아스타나고분은 다녀왔다. 다음은 교하고성을 간후 우루무치로 갈것 이다.

화염산은 시간 관계상 지나치며본다.

화염산은 투루판 분지의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산이다. 투루판 일정중에 때때로 화염산 위치를 본다.


이 산이 유명한 것은 산 자체도 불이 타는 듯 붉은 산이지만 서유기의 무대였던 탓이다.

서유기의 원 저자는 오승원..(1500~1582)으로 알려졌다.
한낮의 햇볕을 받은 산 화염산은 거대한 붉은흙덩어리인듯하다.
화염산 하나만보는것은 그리 큰 구경꺼리가 되지못한다.
이 산이 유명해진것은 서유기라는 소설 때문일터...

위구르인들은 화염산을 빨간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산은 홍사암으로 붉은 색을 띄고 있으며 풀

한 포기 나지 않은 황량한 산이다. 산은 둥글고 예쁜 곳도 있으며 어떤 경사는 마치 불길이 치솟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에 불경을 구하러 가는데 화염산의 불길에 막혀

가지 못한다. 손오공이 파초선(부채)을 구하여 부침으로서 비를 내리게 하여 무사히 화염산을 넘는다.

 

 

 

 

 

 

 

 

배제크릭으로 가는길 주변

 

 

뜨겁다....

낙타를 빌려 타고 화염산 꼭대기 까지 올라가 산 위에서 그 주위 경치를 볼수도 있다.

 

 

 

 

 

 

 

 

황량한 진흙 산.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강....버스에 내려 쉬어가는시간

 

 

 

 

 

 

베제크릭가는길에 내려서 사진을 찍는다.

 

 

 

 

 

 

 

 

 사방이 사막인데 계곡에는 물이 흘러 나무 풀이 자라고 사람이 살고 있다.

 

 

 

 

 

 

 

 

 

 

 

 

그 화염산 아래 계곡에 베제클리크(Beseklik) 천불동(백자극리 천불동) 석굴이 있다.

백자극리란 위그르 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이다. 이 천불동은 화염산 중턱 강 계곡 절벽에 조성된 굴 불교 사원이다.

이곳에 불교사원이 조성된 것은 남북조시대 후기이며 그 후로 당과 오대 송 원 등 7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이다.

고창지역에서는 불교를 대표하는 우일한 유적이다.

이 사원은 굴이 83개 있고 현재 57개가 남아 있다. 현재 투루판에 남아 있는 석굴 중에 제일 크고

내용도 풍부하다. 벽화의 내용은 대형 입불상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가 많다. 굴은 그대로 있지만

불상과 벽화는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벽화는 기구로 긁어 보지 못하게 한 곳도 많았다.

투루판 동쪽 57㎞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대표적 불교유적으로 꼽히는 석굴이다. 

 

 

입구....

 

 

 

 

계곡을 끼고 깃발을 따라 간다.

 

 

 

 

 

 

 

 

 

 

 

오른쪽 낮은 계곡을 이용하여 굴을 파고 벽과 천정에 수많은부처님 상을 그려 놓았고 그 아래있는 계곡으로 내려가면 승려들이 기거하던곳과 그들의 야채밭과 포도밭들이 강 옆에 있다.
대부분의 석굴의 사각형의 방모양으로 만들었고 천정은 둥근 아취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천정을 비롯한 모든 벽에는 아름다운 색상을 사용하여 불상을 그려 놓았다.

 

 

 

 

 

 

 

 

 

 

 계곡 아래에도 무너지고 부서진채로 터가 남아 있다.

 

 

 

 

 

 

 

 

 

 

천불동이라는 이름만 들으면 "굴이 천 개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굴이 100개 내외로 많이 있을 때 '천불동'이라 하고,

1,000개 넘게 있으면 '만불동'이라고 부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 다른 천불동 이름의 뜻은 '석실사원 천정에 천불상이 화려한 색채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천불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입장료 받으면서 다보여주지도 않고 잠궈놓은 것은 뭐이뇨....내부엔 사진도 못찍는다.

훼손이 심하다...

회교가 들어오면서 그렇게 훼손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베제클리크 동굴은 이슬람인들에 의해 불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벽화에 그려진  불상의 눈은 파버렸거나 흙으로

덧칠을 한 상태였다.

 

사막에 석굴이 참 많다.

사막 지형 특성상 동굴 속에서 생활하기가 편했을 것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니까...

 

 

 

 

 

 

 

 

 

 

 

 

 

 

 

 

 

 

 

 

 

 

 

 

 

 

 

 

 

이곳의 석실사원은 고창국의 국보무왕 때인 서기 559년경부터 13세기 원나라 때까지 만들기 시작했는데..

전성기는 10세기를 전후한 회골(回+骨+鳥:위구르) 칸국 시대이다.

현재까지 발견 된 석굴 수는 총 83개로 확인되었는데,

그 중 형체가 남겨진 석굴은 57개 정도이며 벽화가 남아있는 굴은 40개 정도이다. 

그나마 일반에 공개하는 석굴 수도 점점 줄어, 최근에는 여섯 개만 공개하고 있다.  

 

이곳 석굴의 총면적은 1,200 평방미터에 달하여, 투루판에 남겨진 석굴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석굴 내부의 모양은 장방형의 기본 구조에 둥근 아치형 천장 구조가 많고, 벽화는 내벽 전면에 장식되어 있다.

석굴 가운데 예불공간인 중당이 있고 이를 회랑이 둘러싸고 중앙의 천장은 둥근 돔 형태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벽화에 묘사된 인물의 모습과 복장은 중국풍과 더불어 인도, 페르시아, 몽골식도 보이는데,

9세기 이후에는 위구르인들의 모습도 벽화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벽화의 내용은 대형 입불상을 중심으로 한 "불체생경변"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그 외 불교를 표현한 서원화(誓願畵), 천불상 등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이와 같은 그림을 통해 민간인들에게 불법을 전파하려던 노력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어떤 벽화에 그려진 불상에는 금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금이 있던 자리만 ㅤ긁어간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곳도 있다.
이슬람이 번성하였던 당시에는 “사원 벽에 인물을 그리지 않는다”는 종교상의 이유로 벽화에 그려진 석가모니의 얼굴들을

다 지워버리는 수난도 당했다고 한다.
많은 동굴이 잠겨있고 단지 몇 개의 동굴만이 관광객들에게 입장을 허락하였다.

21번 동굴은 왕의 시주로 만들어진 동굴로 이 동굴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하였고

26번 동굴은 삼면 벽에서부터 천정에 그려져 있는 모든 불상의 얼굴을 다 긁어버려 얼굴없이 몸만 있는 불상들로 빼곡하였다.

27번 동굴은 불상의 얼굴이 일부는 긁혀나가고 일부는 진흙으로 발라 훼손 시켰다.
마치 누가 뒤에 쫓아와 급해서 진흙을 바른것처럼…
문화재 관리국에서 진흙 바른곳에 진흙을 벗겨 내 원상으로 복구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여 비교해보았는데

오히려 그대로 두는게 좋다는 결정을 내려 지금은 작업을 중단한 상태라고 하였다.


 

 

 

 

 

( 자료를 참고한 글)

벽화 중에는 예외적인 그림도 존재한다.

그 중 석굴 38호 벽화에 그려진 나무 아래에 흰옷을 입고 서 있는 마니교 신도들의 모습. 

또 석굴에는 위구르어로 쓴 마니교 경전이 보전되어 있고, 삼신광명수(三身光明樹) 같은 마니교 성수가 그려져 있으며

마니동상(높이 9㎝)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위구르족이 고창(高昌)으로 처음 이주할 당시에는 주로 마니교를 신봉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베제클리크 회화에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중국 소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가 표현 되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석굴들에 비해 이곳 석굴이 더 많은 수난을 당했다. 

이곳이 유독 수난을 많이 당한 첫째 이유는 종교적 충돌에 의해서이다.

6세기 고창국 이후로 이 지역이 불교권이었는데 14세기 무렵.. 

투루판 분지가 이슬람영향권에 들면서 무슬림들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를 죄악시 하며, 불상의 눈을 모든 재앙의 근원인 흉안(凶眼: 아이눈 랏마)으로 인식한다.

또 밤에 벽화속의 인물들이 살아나서 그들을 해친다는 교리 때문에

벽화의 눈을 모두 파내고, 불상을 부수고, 진흙을 발라 벽화 자체를 없애려고 하였다. 

 

종교파손에 이어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서방세계의 조직적인 도굴이 있었다. 

190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독일은 네 차례에 걸쳐 ‘탐험대’란 그럴싸한 이름을 붙인 도굴꾼을 투르판에 파견했다.

첫 탐험대는 베를린 민속학박물관의 인도부 부장 그룬베델을 대장으로 한 3명이었다.

당시 거대한 무기상이었던 크루프가 탐험에 필요한 막대한 재정지원을 담당했다. 

정부와 무기상의 지원을 업고 실크로드를 방문한 1차 탐험대가 돌아 왔는데..

석굴에서 뜯은 유물 46상자를 풀어 놓았다. 

기대 보다 엄청난 수확을 하고 돌아 온 탐험대에 크루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1차 탐험에서 엄청난 도굴 가능성을 확인한 정부와 크루프는

본격적인 장기 탐험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고 전문위원회를 만들어 보다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2차 탐험을 출발하기 직전, 그룬베델의 건강이 악화되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룬베델의 대타는 당시 42세의 늦깍이 나이로 민속박물관에서 무보수 견습생으로 일하던 르코크(Le Coq)가 발탁되었다.

 

1904년 9월, 르코크는 탐험대장에 임명되는 행운을 휘날리며 투루판으로 향했다.  

그는 시베리아를 거쳐 우루무치를 통과하여 11월 18일 투루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4개월간 머물며 베제클리크 석굴 벽화를 닥치는대로 뜯었다. 

벽에 톱질을 해서 떡시루판 모양으로 뜯어내어 상자에 담았다. 

이때 담아 가지고 돌아 간 유물이 103상자였다.

 

1905년, 건강을 회복한 그룬베델까지 합류하여 3차 탐험대가 다시 출발했다.

그들은 투루판과 우루무치, 하밀에서 카스까지 이동하며 2년여에 걸쳐 128상자를 또 챙겼다. 

 

유물도굴에 재미를 톡톡히 붙인 르코크는 이후 10년간 실크로드 길을 샅샅이 다니면서 허가(?) 받은 국제 도굴범 노릇을 했다.

잘못된 일도 자신이 하면 정당화 시키는 법이다.

르코크는 당시의 움직임을 기록한 자신의 저서 '사막에 묻힌 중국령 동투르키스탄의 유물들'에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모든 벽화를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떼어낸 벽화들은 배로 20개월 걸려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박물관 방 하나를 벽화로 가득 채웠다.”라고 기록했다. 이때 도굴한 유물들은 베를린박물관에 소장하고 있었는데, 2차 대전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40 퍼센트 정도만 현존하고 있다. 
 

독일의 실크로드 유물 도굴 소식은 오아시스를 타고 전세계로 빠르게 퍼졌다.

1905년에는 러시아의 오브르체프가 당시 막고굴 등에서 유물을 관리하고 있던 왕도사(왕위안루)와 몰래 거래하여 두 다발의 문서를 가져갔다. 

1907년 3월 12일 영국 국적의 오르레 스타인(A.Stein, 1862~1943)이 찾아왔다.

스타인은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동방견문록'에 기록을 남긴 이후, 이곳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 첫 서구인이 되었다. 

스타인은 능숙한 협상술로 왕도사를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했으나,

중국어를 하지 못하였고, 고용한 중국인 조수는 불교지식이 없어 알짜 자료를 챙기는데는 역부족이었다.

1908년에는 프랑스의 펠리오(P.Pelliot, 1878~1945)가 이곳과 둔황 등지를 돌며

능통한 중국어 실력과 불교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29 상자의 유물을 골라 뽑아갔다. 

이때 챙긴 자료 중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프랑스에 도착하고 난 후에야 펠리오도 알게 되었다.

물론 혜초가 한국의 고승이라는 사실은 그도 몰랐다.

 

왕도사와의 거래에 재미를 붙인 스타인이 두 번째로 방문하여 새로운 유물 여섯 상자를 챙겼고,

러시아에서 세르게이 올덴부르크가 방문했으며, 이어 미국의 랭든워너(R Wanner)도 찾아 왔다.

이렇게 중국을 두고 서로 유물을 차지하려는 나라들끼리 상대를 헐뜯는 것은 물론이고,

독일과 러시아간에는 유적 발굴을 둘러싸고 무력충돌 일보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일본도 유물 수집에 일찍이 뛰어 들었는데 그 선봉장은 교토의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제 22대 문주였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였다.

당시 런던에 유학하고 있던 오타니는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스웨덴 탐험가 스벤 헤딘과 영국의 스타인 등이 중앙아시아 탐험을 나서는 것에 자극받아 자신도 탐험대를 조직하였다.

총 다섯 명으로 조직된 탐험대는 1902년 9월 21일 러시아에서 만나 카스를 거쳐 우루무치, 쿠차, 투루판, 하미와 시안을 돌아 귀국했다.

오타니의 두번 째 탐험대는 외몽골과 우루무치를 거쳐 1908년 11월 18일 투루판에 도착했다.

투루판 주위에 있는 토욕구와 천불동, 키질 등을 돌며 수 많은 문헌과 유물을 수집했다.

3차 탐험은 1910년 10월 5일 돈황에 도착하면서 본격 시작되었다.

당시 막고굴을 지키고 있던 왕도사에게 400냥을 주고 당나라 경전 369점을 사들였으며, 토욕구와 천불동, 아스타나고분 등에서 엄청난 유물을 수집하고 1914년 1월 5일에 우루무치를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오타니 탐험대가 3차에 걸쳐 모은 유물의 숫자가 자그마치 5,000점에 이르렀다.

경영은 뒷전인채 탐험에만 정신이 팔린 오타니로 인해 니시혼간지는 결국 파산했다. 

오타니의 파산으로 탐험대도 체계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고,

그가 보유한 유물들은 일본과 중국 뤼순에 있는 오타니의 별장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오타니는 광산개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개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유물의 1/3을 재벌 상인인 구하라에게 팔았다. 

오타니로부터 많은 유물을 사들인 구하라가, 1916년 오랜 고향친구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조선총독에게 조선광산채굴권에 대한 뇌물로 주었다.

오타니 또한 광산 개발권을 따내려고 개인적으로 조선총독에게 유물을 선물했다.

 

이렇게 기증된 오타니 유물이 현재 우리나라 국립중앙박물관에 '오타니 컬렉션'이라는 이름까지 붙어 소장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기이한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전신인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오타니 유물을 소장하고 전시 중이었는데,

종전 후 급작스럽게 짐을 꾸렸으나, 미쳐 챙겨가지 못한 유물을 그대로 물려 받았기 때문이다.

중앙아시아실에 전시 된 투루판 유물 중 오타니가 수집한 유물이 40 퍼센트(1700여 점)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오타니 수집품은 베제클리크, 토욕구 등에서 수집한 벽화 조각들을 비롯하여 

아스타나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과 생활유물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데, 그 가치가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중앙부의 큼직한 과거불 앞에서 왕과 위구르족 상인 등이 성불하겠다는 서약을 바치는 그림인 '서원화'는

9~12세기 투르판을 지배한 위구르인들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는 그림으로 그 가치는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서역 보살상으로 손꼽히는 '공양보살상'은

10세기경 작품으로 열다섯 주제로 그린 조각그림으로 베제클리크 15굴에 있었던 그림이다.

 

많은 문화재를 약탈 당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에,

직접 빼앗은 것은 아니지만 남의 나라 문화재가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모든 사람이 주장하듯 문화재는 자기 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실크로드 유적은 내부관리자와 몰래 결탁한 거래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도굴로 파괴되었지만..

문화재를 보호해야 할 중국정부에 의하여 파괴 되기도 했다. 

대표적 예로 1966년부터 시작된 10년간의 문화혁명 때는 종교탄압에 앞장서던 홍위병들에 의해 수 많은 유물이 파괴되었다.

당시 티베트에 있는 85 퍼센트의 사원들이 파괴되었고, 전국의 공자(孔子) 사당까지도 무차별 파괴당했다. 

 

도굴꾼들이 투루판을 포함한 중앙아시아 일원에서 가져간 유물들은 유럽과 미국의 30여 개 박물관에 ‘유물(流物)’로 보존하고 있다.  

영국의 피터 홉커크는 저서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탐험가들을 '악마'라는 극단적으로 나쁜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

나쁜 사람들임에는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작용도 있었던 것 같다. 

 

실크로드..

아직도 중국 오지에서는 여러 문화재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있는 있는 장면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남의 문화재를 훔쳐간 행위는 나쁜 일임에 틀림 없지만,

최선은 본래의 자리에서 잘 지켜져야 하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말이지만..

중국에 있었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는..

외국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드는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하여간 여러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실크로드 여행길이다.

 

 

 위구르인 악사

 

 

 

연주를 해주고 사진촬영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돈을 받는다.

그늘에 앉으면 시원하다..

문열 열어논 몇개의 굴만 관람하고...잠시 여유를 낸다.

 

 

 

 

 

 

 

기념품점을 끝으로.. 다음 여정이

 

 

 

 투루판 카레즈로 가는길... 유정작업 하는 광경이 보인다.

 

 

 

 

 

 

 

 

 

투루판 시내로 가는길가의 유정.  이곳의 유정은 깊이가 1500m내외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