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해외

[Silk⌒Road] 그 낯선 땅 (25)투루판 - 아스타나고분군

박근닷컴 2011. 9. 14. 19:25

 

아스타나 고분으로 간다.

 

아스타나 고분은 고창국과 당나라 귀족들의 묘지로서 3-8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본다. 고창성 북쪽

넓은 고비의 사자를 매장했던 무덤군으로 동서가 5km 남북이 2km 서진 시대부터 당나라 때까지

수천의 귀족 평민들이 잠자고 있는 고분묘이다.

 

입구에 조형물-(복희와 여와의상)

 

 

 

 

 

 

 

 

 

         묘역이다...

 

 

 

 

 

 

묘역 외관의 담장

 

 

 

 

 

 

 

 

담장 넘어 벽돌을 쌓아놓은것 같은 건축은 포도 건조장이다.

 

 

 

 

 

 

 

 

 

 

 

 

 

 

 

 

이곳은 건조지역이고 지하수가 낮은 조건 때문에 사자나 유물 보관상태가 양호하다. 1959년부터

1979년까지 14회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져 400여 묘가 조사되었고 문서 비단 등 1만 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아스타나는 휴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위구르 어로 '영원히 잠든 묘지' 또는 '휴식의 장소'라는 뜻이라한다. 

아스타나고분의 첫 발견은 1916년 영국의 오르레 스타인(A.Stein, 1862~1943)에 의해 고분이 발굴되었다.

1953년에는 중국 정부에 의해 대대적인 고분 발굴이 있었는데 이때 456기의 고분을 발굴했다. 

 

그 이후 무덤은 관리, 상인, 평민 세 개의 무덤으로 나뉘어 개방하고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얼마 가지 않아 묘실이 나타나며 벽화도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미이라는 우루무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사진촬영 금지하여 인터넷사진 인용)

 

묘실에 안장되있는 미이라.. 양쪽으로 남녀 2기가 있다.

 

 

묘실내부 벽화

 

미라 상태가 좋은 것은 투루판과 우루무치 박물관으로 옮겼고,

지금은 평민 부부 미이라 인데 상태가 썩 좋지는 않지만 한 눈에 보아도 남녀를 구분 할수있다.

이곳 기후가 극도로 건조하여 자연상태로 두었는데도, 미이라는 마른 명태처럼 살도 말라붙어 

발톱까지 남아 있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미이라가 크게 망가지지 않고 보존된 것은 평민이라 부장품이 없기 때문에 도굴범들이 발굴하지 않은 이유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실제 부부는 아니고 발견된 미라 중에서 남녀를 골라 같이 두게 된 것인데..

두 사람은 미이라가 되어 부부가 되는 묘한 인연이 되었다. 

이를 일컬어 사람들은 '천년의 만남'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본래 이 무덤은 고창왕조 시대에 좌위대장군을 지낸 장웅(張雄)의 묘소인데, 

그 본래의 미이라는 우루무치 박물관에 옮겨 전시되어 있고, 지금은 부부로 칭한 미이라를 전시해 놓았다. 

 

 

 

 일행이 묘실입구를 내려다보고있다.

 

사진에 보듯 평범하게 흙덩이가 흩어져 있는 곳처럼 보인다.

 

이곳에 있는 묘의 양식은 대부분 비슷하다.

땅 표면에서 지하로 45도 방향으로 길을 만들고 묘실 입구에 문을 만들고, 흙으로 덮어 나즈막한 봉분을 만들었다.

입구와 묘실 사이의 벽에는 또 다른 방, 이실이 있는데 그곳에는 그림이나 각종 문서를 보관했다.

묘실 내부 모양은 평면적으로 장방형의 '갑(甲)'자 모양을 띄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안장 초기에는 관을 만들어 안장했지만, 후기에는 사막에서 구하기 어려운 목재관을 사용하지 않고 종이관으로 안장했다.

묘실 안에는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아도, 이 지역의 매우 건조한 기후 때문에 자연 상태로 미라가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아스타나고분은 투루판(吐魯蕃) 시에서 동쪽으로 4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3세기부터 8세기까지 500년간 고창국(高昌國)과 당나라 귀족, 이 지역에 파견된 중국관리들을 안장한 묘지(墓地)를 말한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묘는 서진태시 9년(273년)의 묘이며, 가장 최근의 것은 당대력 6년(772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분의 총면적은 10㎢에 이르며, 동서 길이 5km, 남북 2km 길이의 거대한 공동묘지로 

이곳 지하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수 천개의 공동묘지가 매장되어 있고,

그 속에 수 많은 유물들이 매장된 지역으로 지하박물관이라고 부른다.

 

 

 

 

 

 

멀리 보이는 화염산

 

 

입구에 복희여와의상

 

(사진출처 인터넷퍼옴)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 투르판의 고분군에서 발견된 복희ㆍ여와도.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남신인 복희와 여신인 여와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아스타나 무덤에서 이와 같은 그림은 주로 천정이나 시신 옆에서 발견된다.

(사진설명: 오타니 고즈이가 도굴하여 국립중앙박물관 3층에 전시되고 있는 복희와여와도)

남자인 복희와 여자인 여와는 중국의 신화전설에 나오는 인류의 시조로서 이들의 혼인에 의해 인류가 탄생되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의 옛날 전설은 홍수에서 시작된다.

 

"옛날 그 옛날에 대홍수가 일어나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

오빠인 복희와 누이동생인 여와는 커다란 박을 타고 다니다 살아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두남매가 하루 하루를 살았다.
어느날 외로움을 느낀 오빠가 동생에게 결혼하여 아이를 갖자며 조르기 시작했다. 
여와가 부끄러워하며 절대 있을 수 없다고 거절했는데,

계속적으로 졸라 대는 오빠 때문에 하늘에 그 뜻을 물어 보고 결정하기로 하였다. 

'각자 다른 산에 올라가 연기를 피워 그 연기가 서로 만나면 하늘에서 함께 살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서

산에 올라 불을 피웠다. 

신기하게도 멀리 떨어진 연기가 서로 만나 합쳐졌다.

이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여와도 오빠와 부부가 되기로 했다.

이들로부터 자식들이 생겨나 인류가 계속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복회와여와의 전설이다.

 

 

창조의 상징물로 남신(男神) 복희는 왼손에 측량을 위한 곡척(曲尺)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묵통을 들고 있으며,

왼쪽의 여와는 오른손으로 컴퍼스(가위)를 들고 있다.

 

복희는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 가운데 가장 으뜸인 황제이다.

복희는 팔괘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고기잡는 법과 사냥하는 법을 가르쳤으며,

여와는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고 맹수를 쫓아냈으며 물길을 다스려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호하였다.

 

창조신인 이들이 뱀의 모양을 하고 서로 몸을 꼬고 있는 모습은..

이를 통하여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천지만물이 새롭게 탄생한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죽은 자의 환생과 풍요로운 휴식을 기원하는 내세관을 표현하고 있다. 

 

복희여와도를 묘실 천정에 부착해둔 것은 묘실 그 자체를 죽은 자가 맞이하는 내세의 영적 공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복희여와도에

묘사되어 있는 북두칠성 역시 영생을 바라는 칠성 신앙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지역적 변용을 이룬 예라고 볼 수 있다.
아스타나 출토의 복희여와도는 대개 비단에 그려져 있으나, 이 유물은 마(麻)에 그려져 있는 드문 예에 속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복희여와도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비단 이외의 재질에 그린 것도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검은색, 붉은색, 흰색 등 세 가지색을 이용하여 화면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 점은 같은 묘실 안에 시신 머리맡에 놓여 있는 명기(明器)의 채색 방법과 같다.


복희여와도는 신장(新疆) 위구르자치구박물관, 투르판박물관, 여순박물관, 브리티시박물관, 인도 뉴델리국립박물관, 일본의 류코쿠(龍谷)대학, 텐리(天理)대학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이 복희여와도는 이제까지 발견된 그 어떤 것보다 색상 대비가 선명하고 세련된 묘사와 균형 잡힌 구성이라는 점에 있어 최고의 것이라고 할 만하다.

 

 

 

투루판 포도

 

 

 포도 농가이다...(차창으로 계속 보인다)

 

 

 

 

 

 

 

 

 

집집마다 벽돌로 만든 구멍이 뚫린 포도 건조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