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시·관람

[스크랩] 역사의 라이벌, 다시 나란히 서다 [1] - 초상화의 비밀

박근닷컴 2011. 11. 9. 01:30

영웅사관의 입장을 취하든 민중사관의 입장을 취하든, 역사를 주도한 세력에게는 이에 대항하는 '맞수'가 늘 있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라이벌', 혹은 '반동 세력'으로도 불리는 이 '맞수'는 그 상대방이 유명한 위인이든, 혹은 이름 없는 민중이든 상관없이, 때로는 긍정적인 역할을, 또 때로는 부정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역사의 페이지를 하나 하나 장식해갔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정 · 반 · 합' 논리에 의한 변증론을 통해 오랫동안 다뤄져온 것이니, 비단 지금 와서 논한다는 게 새삼스러울 건 없겠다.

        

         

한 역사 인물과 관련한 유적지를 찾을 때 우리는 그 인물의 라이벌에 대해 생각해보곤 한다. 김춘추의 묘를 답사할 때에는 연개소문을, 성삼문의 사육신묘를 둘러볼 때에는 신숙주를, 이순신의 한산도를 방문할 때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혹은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동학농민군의 전적지를 들를 때에는 수구파 및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유적지 내에서 이러한 맞수들의 이미지는 대개 답사객들의 '상상' 속에서만 갇혀있게 마련이다. 한산도에서는 이순신과 관련한 것들만을 볼 수 있으며, 맞수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관련한 것들은 순전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 그려진다. 반대로 오사카 성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지만, 맞수 이순신의 이미지는 시각적 유물 없이 사람들의 생각 안에서만 돌아다닐 수밖에 없다.

       

        

역사를 '정'의 방향과 '반'의 방향으로 동시에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물질적 한계는 분명 큰 아쉬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가진 사람들에게, 9월 27일부터 11월 6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은 그 갈증을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여진다.

      

       

△ '초상화의 비밀' 언론공개회에서, 기자들이 학예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하늘과 땅', '인의예지', '자아와 일상', '새로운 눈, 사진' 이렇게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서 전시되는 이번 특별전에서 볼 수 있는 역사의 맞수들은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허목과 송시열', 그리고 '송시열과 윤증'이다. 이들 모두 당대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들로써, 각기 라이벌 간에 치열하게 전개됐던 두뇌싸움은 후대인들로 하여금 쏠쏠한 흥미를 느끼게 해준다. 서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 맞수들의 초상화를 감상하면서 관람객들은 어느 한 쪽의 시각만이 아닌 그 반대쪽의 시각으로도 함께 역사를 바라보게 될 것이고, 이는 곧 '역사를 다루는 관점의 다양화'라는 지적 즐거움으로 확대될 것이다.

   

       

1부에는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야에스'를, 2부에는 '송시열과 허목'이라는 소제목으로 게재될 본 기사를 통해, 필자는 '초상화의 비밀'에서 볼 수 있는 맞수들이 각기 어떤 신경전을 벌였는가에 대해 짤막하게 다뤄보겠다.

        

         

1) 사명대사 VS 도쿠가와 이에야스

        

         

현재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승장(僧將)의 이미지로 널리 각인되어 있지만, 사실 그는 외교적으로 더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전쟁 후 일본에서 발휘한 그의 기지가 없었다면 조선은 일본의 재침 가능성에 대한 쓸데없는 두려움을 오래토록 가졌을 것이며, 일본으로 잡혀간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일본에서 그 생을 마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명대사의 노력 덕분에 조선은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고, 일본이 조선을 재침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하에 보다 유리한 조건에서 일본과의 통상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상 재개는 곧 통신사 파견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오래토록 가져다 주었다. 사명대사 덕분에 조선 통신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말이 결코 허언이 아닌 셈이다. 게다가 사명대사의 포로 송환은 포로들에게 있어서는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았다는 거대한 기쁨을, 조선 정부에 있어서는 전후 복구 사업을 위한 인적 자원 확보를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실로 크다고 아니 말할 수 없겠다.

      

       

그러나 사명대사가 이러한 성과를 결코 쉽게 얻어낸 것은 아니었다. 일본사를 통틀어 첫째가는 능구렁이라 할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사명대사의 맞수였기 때문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최후의 막부인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으며, 엄청난 정치적 능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일본의 1인자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는 인고의 세월을 오랫동안 겪어야 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 당시 이에야스는 아직 자신의 힘이 히데요시의 그것에 미치지 못함을 알고는 스스로 도요토미 세력에게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말에 복종하면서도, 임진왜란 때는 자기 군사들을 출병 전초 기지였던 나고야에 대기만 시켜놓은 채 갖은 핑계를 대며 끝끝내 조선으로 파병하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러면서 착실히 힘을 키워나간 이에야스와는 대조적으로, 도요토미 세력은 오랜 전쟁으로 인해 그 힘이 서서히 소진되어 갔다.

       

           

△ 사명대사 진영(보물 제1505호). 1796년경에 제작된 초상화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이에야스는 막바로 정권을 휘어잡을 법한데도 결코 서두르지 않았으니, 오히려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의 권력을 인정하고 그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며 명분 쌓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는 히데요시 사후 도요토미 세력과 도쿠가와 세력 중 어느 쪽으로 붙을 것인지 저울질을 하던 다수의 중도파 다이묘들로 하여금 도쿠가와 편을 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세키가하라 대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도요토미 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한 후에도, 이에야스는 히데요리의 지위를 계속 인정해 줌으로써 자신의 의리와 정통성을 널리 선전하였다. 이러한 이에야스의 정치적 수완은 후에 이에야스와 결별한 히데요리가 반 도쿠가와 세력 결집을 위해 전국에 격문을 날렸음에도, 과거 히데요시 밑에 있던 다이묘들 상당수가 히데요리 측에 가담하지 않게끔 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음으로써, 일본에 대한 도쿠가와 가문의 지배권을 깊숙이 뿌리박는 데 성공하였다. 행동하는 데 있어 늘 치밀하고 신중하고 교묘했으며 정치적 수완 또한 상당했던 인물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명대사는 이런 맞수를 상대해야 했다. 그것도 적지에서 홀로.

        

         

1604년 12월 교토.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만남을 가진다. 사명대사가 회담을 통해 얻으려는 바는 다음과 같았다.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알아볼 것,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의 사과를 얻어낼 것, 포로들을 송환해올 것.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명대사와의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들을 취하려고 했다. 자기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 조선과의 국교를 회복하고 통상을 재개하는 것. 정식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 간의 회담 내용은 극히 일부만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일들을 기초로 역사적 상상력을 조금만 발휘해본다면, 우리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 교토대학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유물이다.

          

            

이에야스는 조선과의 국교 회복을 간절히 원했다. 조선과의 국교 회복은 곧 조선이 자기 정권을 인정한다는 의미가 되니, 이는 곧 도쿠가와 가문의 통치력을 더욱 굳건히 하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임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조선과의 통상 재개 또한 경제적 이익 확보를 위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과제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신의 급한 처지를 상대방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는 곤란했을 것이다. 자신의 조급함을 철저히 숨긴 채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사명대사를 대하는 것이, 손해를 최소화하면서 조선으로부터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테니 말이다. 특히 이에야스에게 있어 포로들을 돌려보내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일본 또한 잇따른 전쟁으로 일손이 부족했기에 포로들의 노동력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더욱이 일본의 발전을 위해서는 포로들이 소유하고 있던 조선의 앞선 기술과 문화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교 회복과 통상 재개를 이끌어냄과 동시에 포로들은 계속 남겨두는 것. 이를 위해 이에야스는 최대한 자신의 위엄을 드러내며 사명대사를 대했을 것이다. 정치의 대가인만큼 머릿속으로는 치밀한 계산을 하면서 말이다.

        

         

사명대사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일단 일본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올 것인지의 여부를 알아오는 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이미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일본이 재침을 해온다면, 이는 다시금 국가적 위기로 다가오는 일일테니 말이다. 만약 일본이 재침의 의지 없이 조선과의 국교 회복 및 통상 재개를 요청해온다면, 이에 상응하는 합당한 조치를 얻어내는 것 또한 중요했다.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은 터라 복구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던 조선의 입장에서 볼 때, 포로들을 송환해오는 일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사명대사가 가진 가장 큰 약점은 그가 조선의 정식 외교사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눈치를 보느라 정식 외교사절을 보내지 못했던 조선의 서글픈 현실이 반영된 거였다. 지금 자신이 정식 사절도 아닌 일개 중과 외교를 논하는 것임을 이에야스가 알아차린다면, 사명대사에게 있어 대단히 불리하게 작용되리라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각자 이러한 속사정을 품은 채 둘은 1605년까지 회담을 진행했다. 치열한 신경전 끝에 나온 회담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조선과 일본 간의 국교를 회복하고 통상을 재개할 것, 일본은 전쟁에 대한 책임 인정 및 사과가 적혀 있는 국서를 조선에 발송할 것, 또한 일본은 3,000여 명의 포로들을 조선에 송환할 것. 양쪽 모두 나름 만족할 만한 성과라고 할 수 있으나, 분명 회담의 승리는 조선의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이 별안간 다시 침략해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알아냄으로써 전후 복구 사업에 더욱 주력할 수 있었다. 게다가 포로들까지 송환해 옴으로써 재건을 위한 인적 자원 확보 또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그렇듯 이전에 벌인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명백한 사과를 되도록 피하고자 했으나, 결국 사과 내용이 적힌 국서를 조선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홀로 적진에서 민간인의 신분으로, 그것도 당대 최고의 실력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상대로 대담하게 회담을 펼친 사명대사의 공이라 할 수 있겠다.

    

      

△ '초상화의 비밀' 개막식에서, 정동극장 한국전통뮤지컬 '미소' 팀이 국악 연주를 선보이고 있다.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역사의 광풍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과 일본 막부 정권은 250 ~ 300여 년을 더 버텼다. 그리고 이러한 존속의 출발선에는 사명대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맞수들 간의 대결이 자리잡고 있었다.

     

      

(2부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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