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로 맞수들끼리의 치열한 대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정치라 할 수 있다. 조선 또한 예외가 아니라서 건국 당시에는 권문세족 대 신진 사대부, 1500년대에는 훈구파 대 사림파, 그리고 중기 이후에는 동인 대 서인, 북인 대 남인, 대북 대 소북, 공서 대 청서, 서인 대 남인, 청남 대 탁남, 노론 대 소론, 시파 대 벽파로 각기 다양한 맞수들을 형성해 가며 정치의 흐름을 이어나갔다. 즉 맞수들 간의 대결이 곧 당시 역사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가 이런 '맞수'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글에 이어서, 이번 기사에도 기획특별전 '초상화의 비밀'에서 볼 수 있는 맞수들에 대해 다뤄보겠다. 본 글에서 얘기할 맞수는 '남인의 리더 허목'과 '서인의 총수 송시열'이다.
2) 허목 VS 송시열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이 승하한 1659년. 이 시기 조선은, 현대인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상한' 논쟁으로 인해 꽤나 시끌벅적거렸다. 이른바 '예송(禮訟)' 논쟁이라 불리는 이 다툼의 내용은, 효종이 죽음으로써 그 계모 되는 사람인 장렬왕후 조씨, 즉 자의대비가 과연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상복을 몇 년 동안 입을 것인지를 놓고 치열하게 입싸움을 했다는 사실이 요즘 시대에는 이상하게 비춰질 수 있겠으나, '예(禮)' 중심의 성리학이라는 이념을 숭상하는 나라 조선에서는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물론 이러한 예송 논쟁에는 이념적 · 학문적 견해 차이와 같은 형식적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 정치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다툼이라는 실질적 문제 또한 포함하고 있었다.
예송 논쟁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효종의 애매한 위치에 있었다. 효종은 선대 임금 인조의 적장자가 아닌, 둘째 아들[次子]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1645년 소현세자의 석연치 않은 죽음으로 공석이 된 세자 자리의 주인은, 예법으로 보자면 적장자 소현세자의 장자 경선군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를 너무나도 미워했던 인조는 '예법을 어기는' 무리수까지 둬가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봉했으니, 이가 곧 나중에 효종으로 즉위하는 사람이다. 바로 이 효종이 1659년 승하하자 문제가 터진 것이다.
조선 전기에 제정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맏아들이든 맏아들이 아니든 그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무조건 1년상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예법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약간 변하게 되는데, 즉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숨을 거두었을 때 그 부모는 사망한 자식이 적장자인 경우에는 3년 동안, 차자 이하인 경우에는 1년 동안 상복을 입는 쪽으로 조금의 수정이 가해졌다. 경국대전을 따르든 수정된 예법을 따르든 왕가를 여느 종가와 똑같이 취급하자면, 자의대비는 죽은 '둘째 아들' 효종을 위해 1년 동안만 상복을 입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일반 백성들도 장자가 죽으면 그 부모가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주는데, 한 나라의 임금이라는 사람은 되려 차자라는 이유로 그 부모가 달랑 1년상만 치르게 된다는 점에서 그 모양새가 다소 이상하게 된다. 따라서 왕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서 효종은 인조의 적통을 이은 임금이라 사실상 장자와 다를 바 없다고 해석하여, 이 경우 자의대비는 3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결국 예송 논쟁은 왕가를 보통 사대부가와 같게 취급할 것인가, 아니면 왕가만의 특수한 처지를 인정하여 사대부가와는 달리 바라볼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으며, 여기서 전자의 입장은 당시 집권당이었던 서인이, 후자의 입장은 야당이었던 남인이 취하게 된다.
서인은 인조반정으로 대북을 몰아낸 뒤로부터 쭉 정권을 잡아오고 있었다. 중간에 병자호란이라는 큰 암초를 만나기도 하였으나,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반청 운동을 널리 확산시킴으로써 그들의 정치적 지위를 계속 공고히 했다. 인조는 자신을 옹립한 공신 세력인 서인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고, 권력의 축은 차츰 서인 중심의 사대부들 쪽으로 기울게 된다. 서인은 앞으로도 계속 왕권을 자기 통제 하에 두고 싶어했으며, 이것이 예송 논쟁에서 왕가를 일반 사대부가와 동일하게 취급하고자 했던 정치적 배경으로 작용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인은 2인자의 설움을 떨쳐내기 위해 속으로 칼을 북북 갈고 있었다. 남인은 대북을 몰아내기 위해 인조반정 때 서인과 힘을 합치기도 하였고 한동안 이러한 공조 체제가 쭉 유지되었으나, 언젠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서는 기존의 터줏대감인 서인과 한판 승부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를 위해 남인은 역시 서인에 의해 권력으로부터 점점 소외되어 갔던 왕권과 결탁하게 되었고, 이는 예송 논쟁에서 남인이 왕가는 특별하게 봐줘야 한다고 주장하게끔 하였다. 효종의 죽음을 계기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된 서인과 남인. 송시열과 허목은 바로 이들 각 세력의 선두에 선 채 자기 당파를 진두지휘하였던 것이다.
임금마저 일개 사대부와 같게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한 송시열을 보자면, 그가 혹시 효종과의 사이가 나빠서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효종과 송시열 간의 사이는 오히려 매우 가까운 편이었다. 이 둘의 인연은 1635년 송시열이 봉림대군, 즉 훗날 효종이 되는 이의 스승으로 임명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과 봉림대군은 서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니, 이 둘을 이어준 끈은 바로 '북벌론'으로 대표되는 '반청복명' 운동이었다. 철저한 존명사대론자였던 송시열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를 정벌해서 명나라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소위 '북벌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청나라가 중국의 새 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의 중화 문명은 청나라가 아닌 조선이 계승했다는 소위 '소중화사상'을 역설하기도 하였다. 봉림대군이야 병자호란 직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으로 끌려가서 인질 생활의 고초를 직접 겪은 몸이니, 청나라에 대한 그의 높은 적개심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라는 일념 하에 송시열과 봉림대군 간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고, 이는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한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당시 송시열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소위 산림(山林) 생활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효종은 그를 계속 궁에 불러들여 북벌에 대해 의논하곤 하였다. 사관조차 물리친 채 단 둘이서 말을 나눈 적도 많았으며, 심지어는 1658년 송시열이 이조판서에 임명된 후 효종이 북벌 때 입으라며 그에게 단비 가죽으로 만든 털옷을 하사할 정도였다.
이렇듯 서로 간에 밀접한 정치적 동지였던 송시열과 효종이었지만, 구체적인 북벌 방법에 있어서는 '상당한' 시각차가 존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견해차는 각자 추구한 정치적 이상의 차이에서 비롯된, 서로 조화될 수 없는 '근본적인' 견해차였다. 효종은 군사적 북벌을 추구하였으며, 이를 위해 군제 개혁, 장병 모집 및 훈련, 무기 개량 등 구체적인 작업을 해나갔다. 조총수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심지어는 군사들로 하여금 청나라 군의 전투 자세까지 체득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는 신하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이러한 군사적 작업들이 안 그래도 피폐해진 백성들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실상은 이렇게 키워놓은 군사들이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도 활용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였으니 효종은 군사력 증강을 통해 안으로는 삼전도의 굴욕으로 땅에 떨어진 왕권의 재정립을, 밖으로는 자신의 목표인 북벌을 실행에 옮기고자 하였다. 특히 일각에서 효종에 대해 일고 있는 자격 시비, 즉 둘째 아들이 왕이 된 것에 대한 따가운 눈총을 무마시키는 용도로도 북벌론이 활용되었다. 어쨌든 이러한 효종의 움직임에 위협을 느낀 신하들 중 몇몇은, 김자점 등의 공서(功西) 세력 일부와 친청파(親淸派) 신하들을 중심으로 북벌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명분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였기에, 대다수의 신하들은 이러한 효종의 북벌론 자체에 대해 대놓고 반대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서인 세력들은 북벌론 자체는 인정하되 이러한 북벌론을 어떻게 하면 오히려 자기들의 세력 강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골몰하게 되었으니, 이와 같은 논리 제공에 큰 몫을 담당한 인물이 바로 송시열이었다.
사실 효종이 1658년 송시열을 이조판서에 임명한 이유는, 군사적 방법을 통한 북벌에 대해 사대부들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 산림(山林) 세력을 중심으로 이미 곳곳에서 효종의 북벌 계획에 대해 볼멘소리가 터져나왔고, 송시열 역시 1657년 '정유봉사(丁酉封事)'라는 상소문을 통해 효종의 북벌 계획이 방법론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주장한 바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송시열은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이 뼛속 깊이 물들어 있는 인물이었기에, 북벌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구체적인 북벌 방법은 효종의 그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군사적 북벌을 주장한 효종과는 달리, 송시열은 '수기형가(修己刑家)' 및 '내수외양(內修外攘)'을 통해 청나라를 정벌해야 한다고 일갈하였다. '수기형가'는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 '내수외양'은 '안으로 나라를 잘 다스려서 그 힘으로 바깥의 적들을 물리친다'를 의미하는 말인데, 두 문구 모두 결국은 내치(內治) 안정에 초점을 맞춰야 함을 지적하는 거였다. 즉 효종이 하는 것처럼 무리하게 군사력을 증강하지 말고, 일단 나라 안부터 정리하는 식으로 북벌을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 송시열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정리'를 위한 수단으로 주자학에 의거한 유교 질서 확립을 들고 나왔는데, 여기에는 '백성들로 하여금 군사 훈련 대신 생업에 힘쓰게 할 것', '사대부들을 우대할 것'과 같은 구체적인 방법론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임금은 괜히 설치지 말고 사대부들, 특히 서인 세력의 말에 조용히 귀 기울이는 것이 최상의 북벌 방법이라는 얘기다. 북벌론이 서인의 세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신하들이 이러한 송시열의 논리를 내세우며 군사적 북벌 계획에 대해 사사건건 태클을 걸자 답답해한 효종은 송시열 등 산림(山林) 세력들을 대거 등용시키는 방법으로 사대부를 어르고 달랬으나, 결국 이들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채 1659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처럼 송시열은 임금과의 개인적 친분도 뒤로 한 채, 왕권을 견제하고 사대부 주도의 정치를 유지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이를 위해 '북벌'이라는 국가적 대사조차 자신들 세력에 유리하도록 변형한 채 이를 적용하였고, 이러한 작업은 결국 성공을 거두어 병자호란 후에도 서인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게끔 하였다. 그에게 있어 임금은 단순히 '제1사대부'일 뿐 그 본질이 사대부라는 점에 대해서는 여느 사대부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따라서 송시열이 보기에 임금과 보통 사대부를 서로 달리 취급해야 하는 이유는 전혀 없게 된다. 게다가 그는 모든 예법은 주자학에 기초한 전통 예론(禮論)에 의거해야 한다는 철저한 유교적 원리원칙주의자였다. 이러한 예론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하며, 따라서 둘째 아들이 죽었을 경우 부모는 1년상을 치러야 함은 왕가나 사대부가나 매한가지라고 송시열은 보았던 것이다. 송시열의 눈에는 어차피 '왕가 = 사대부가'이니, 애당초 이 둘을 나눈다는 자체가 무의미하겠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북벌론'과 '임금 사후의 장례 문제' 모두에서 서인이 '다소 과도하게' 설쳐대자 남인은 본격적으로 이에 반대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허목이었다.
1595년에 태어난 허목은 효종 때 이미 이름난 학자로 그 명성이 높았으나, 본격적인 정치적 출세는 환갑이 넘은 1659년에야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한 가지 사연이 있었으니, 바로 인조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에 휘말린 것이다. 사실 임금의 아버지를 추존왕으로 봉한 것은 이미 전례가 있는 일이었으니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 즉 덕종의 경우가 그러했다. 하지만 덕종은 생전에 세자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훗날 왕으로 추존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정원대원군은 살아있을 때 세자 자리에 올랐던 적이 없었으므로, 세자였던 적도 없는 인물을 추존왕으로 봉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왕실은 '이괄의 난'으로 인해 공주에까지 피신했을 정도로 그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조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세력 또한 곳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따라서 인조는 어떻게든 자신의 아버지 정원대원군을 왕으로 추존함으로써, 왕실의 위신도 세우고 자신의 정통성 또한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임금의 움직임에 서인, 특히 최명길, 이귀 등의 공서(功西) 세력이 동조하게 되었는데, 이들로서는 자신들이 옹립한 왕 인조의 위신을 세워주는 것이 곧 자기 세력의 기득권 또한 공고하게 하는 것이었기에 인조의 바람을 실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곧 강력한 반발을 맞이하게 된다. 언론삼사(言論三司)든 유생이든 곳곳에서 극렬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나왔으며, 심지어 서인들 상당수도 이러한 임금의 무리한 작업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특히 유생들의 반대가 심했는데, 이들은 왕의 의지를 꺾기 위해 박지계 등의 추존 찬성 인물들을 유생의 명부에서 삭제하고 수업을 거부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유생들의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영남 퇴계학파 밑에서 수학한 허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유생들의 반발이 거셌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허목 등 반대 주동 유생들의 과거 응시권을 박탈하는 '정거(停擧)'로 강경하게 맞섰으며, 공서(功西) 세력의 도움을 받은 끝에 드디어 1632년 정원대원군을 원종으로 봉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후 조선은 3명의 추존왕 - 진종, 장조, 익종을 더 맞이하게 되지만, 원종처럼 세자도 아니었던 인물이 왕으로 추존된 사례는 더 이상 발생하지 않는다. 그만큼 정원대원군의 원종 추존은 조선 역사상 유일무이한, 엄청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 일로 벼슬길의 뜻을 접은 허목은 30여 년 동안 여러 산천을 돌며 학문에만 몰두했다.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이런 허목을 조정에 불러들이고자 부지런히 노력하였으며, 이에 허목도 1650년 정릉참봉 직을 받들기는 했으나 곧 그만두었다. 그리고 1657년에는 공조정랑 및 지평(持平)에도 임명되었으나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서를 제출했다. 이러는 동안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이 내세운 '그들만의' 북벌론이 차츰 그 권위를 떨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서인들의 세(勢) 또한 점점 강해져갔다. 산림(山林)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남인의 리더로서 존경을 받고 있던 허목으로서는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 없었고, 결국 1659년 장령(掌令) 벼슬을 받듦으로써 본격적으로 서인과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허목은 장령에 부임되자마자 송시열, 송준길 등 서인이 주도하는 북벌 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이는 겨우 시작에 불과하였으니, 곧 '예송 논쟁'이라는 거대한 한판 승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허목, 윤선도 등의 남인은 자의대비로 하여금 3년 동안 상복을 입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효종은 비록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는 하나, 적법하게 왕위를 물려받은 이상 사실상 첫째 아들과 같게 취급을 해줘야 한다는 거였다. 남인은 왕가를 보통 사대부가와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바라봤으며, 따라서 예법 또한 왕가에는 달리 적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여기에는 서인에 비해 그 세(勢)가 다소 부족한 남인이 왕권과 결탁함으로써 정세의 주도권을 쥐어 보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사실 일부 서인들도 왕가의 예법에 대해서는 신하들이 한 발 양보해 줄 수 있다는 생각 하에 이러한 남인들의 주장에 공감했으나, 유교적 원리원칙주의자이자 왕권 견제에 온 심혈을 기울였던 송시열의 입김으로 인해 결국 모든 서인들이 '1년상'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왕가는 특별히 다뤄야 하므로 '3년상'을 주장했던 남인과, 왕가도 사대부가와 같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1년상'을 주장했던 서인. 예송 논쟁은 '예(禮)'와 왕가의 지위에 대한 학자들 간의 근본적인 시각차라는 이념적 요소와, 당대 권력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 간의 암투라는 실질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띤 문제라 할 수 있겠다.
예송 논쟁에서의 승리는 곧 자신이 상대방보다 '예(禮)'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의미했고 이는 자기 세력의 세(勢)를 더욱 떨칠 수 있는 계기로 작용될 수 있었기에, 서인과 남인 모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논리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신하들 간의 논쟁을 묵묵히 바라본 새 임금 현종은 내심 남인 쪽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당대 최고 석학들 간의 논쟁에 섣불리 끼어들 만큼의 학문적 · 정치적 능력은 가지지 못했다. 예송 논쟁을 주도한 허목, 윤선도, 송시열, 송준길은 유교에 대해 가히 통달했다고 해도 될 만큼 그 학문적인 깊이가 상당했기에, 이러한 대가들끼리의 싸움터에 풋내기 임금 현종은 감히 나댈 수 없는 형편이었다. 더욱이 현종은 예송 논쟁의 시발점이 된 효종의 그 '애매한' 위치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임금이었다. 인조가 무리수를 둬가며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점찍었기에 현종 또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지, 애당초 현종은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게다가 소현세자가 낳은 3명의 아들들, 즉 적법한 왕위 계승자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인 경선군, 경완군, 경안군 중 3남 경안군이 아직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이었던지라 신하들, 특히 집권 세력인 서인의 눈 밖에 나면 언제든지 제3의 반정 사태가 일어날 수 있었다. 결국 현종은 제1세력인 서인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고, 송시열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허적 등 몇몇을 제외한 남인 상당수가 정계에서 대거 축출당했다. 허목도 예외가 아니라서 그 역시 삼척부사라는 지방직으로 좌천되었다. 삼척부사 재임 시절 허목은 향약을 제정하고 수해(水害) 방지를 위한 기원의 의미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도 만드는 등의 선정(善政)을 베풂으로써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어쨌든 '기해예송'이라 일컫는 남인과 서인 간의 1차 대결에서는 '표면적으로는' 서인의 승리로 끝났으나, 효종의 지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확실히 매듭짓지 못하고 어물쩍 넘어갔기 때문에 차후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쟁의 씨앗은 기해예송이 일어난 지 15년 후인 1674년에 그 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마니, 이른바 '갑인예송'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갑인예송'은 효종의 비(妃)이자 현종의 친모였던 인선왕후 장씨가 1674년 사망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이번에는 죽은 며느리를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장렬왕후 조씨, 즉 자의대비는 비록 계모이기는 해도 효종의 어머니[母]로서의 위치에 있었으나, 사실 효종보다도 5살이나 어린 인물이었다. 따라서 효종이 죽은 1659년에 자의대비는 불과 36살이었으니, 그녀가 1674년까지 살아있다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쨌든 서인과 남인은 다시 한 번 격렬한 논쟁을 벌였으나, 사실 그 패턴은 15년 전의 '기해예송'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기해예송이 효종을 '둘째 아들'로 볼 것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처럼 취급해 줄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면, 갑인예송은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첫째 며느리'로 다룰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다는 것뿐이다.
사실 1659년의 기해예송을 해결하는 데 가장 결정적이었던 요소는 바로 '경국대전'이었다. 즉 효종은 둘째 아들에 불과하다는 송시열의 주장보다는 경국대전에 규정된 법조문이 효종의 장례를 '1년상'으로 하는 데 더욱 크게 작용하였던 것이다. 앞서 기해예송이 서인의 '표면적인' 승리에 불과하다고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경국대전에서는 첫째 아들이든 둘째 이하 아들이든 자식이 죽으면 그 부모는 1년상을 치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예법 상당수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서서히 사문화되어 갔다. 잇따른 전쟁으로 그 입지가 흔들리게 된 사대부는 자신들의 권위를 흔들림 없이 쭉 유지하고자 예법을 변형 적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대부들이 벌인 일들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아들과 딸', 그리고 '맏아들과 나머지 아들' 간의 차별을 심화시킨 거였다. 앞서 살펴보았듯 경국대전에서는 장자와 그 이하 아들의 장례에 대해 특별한 차이를 두지 않았다. 상속 또한 첫째 아들이든 둘째 아들이든, 그리고 아들이든 딸이든 모든 자식들이 똑같이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는 '균분상속제'를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집안 내 권력을 맏아들 출신의 가부장 한 사람에게 집중시킴으로써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에 의해, 이러한 예법들은 그 모습이 서서히 변형되어 갔다. '균분상속제'는 '장자 단독상속제'로 차츰 대체되었으며, 아들의 장례 또한 장자와 그 이하 아들들 간에 차별을 두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현종 치세 당시 경국대전은 이미 유명무실한 상태였으나, 이렇게 해묵은 법전 활용 없이는 그 해결이 불가능했을 정도로 기해예송 당시 남인과 서인 간의 논쟁은 그만큼 격렬했던 것이다. 기해예송 때 경국대전이 유용했던 이유는 효종의 지위에 대한 확정 없이도 이 법전을 통해 논쟁이 임시방편으로나마 해결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서인의 입장에서 볼 때 효종이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1년상을 치르든 경국대전에 의해 1년상을 치르든 그 결론은 똑같이 1년상이었기 때문에 경국대전을 통한 문제 해결에 불만이 있을 리 없었고, 현종과 남인들 역시 1년상으로 치른다는 것이 꼭 송시열의 주장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그리 한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었기에 나름의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이러한 전례를 통해 갑인예송 때에도 경국대전으로 문제를 해결할 법 하였으나, 이번에는 그러한 임시방편이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기해예송과는 달리 갑인예송은 효종의 지위를 확정되어야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아들의 경우와 같이, 첫째 며느리든 둘째 이하 며느리든 며느리가 죽으면 그 장모 되는 사람은 1년상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며느리의 장례에 있어서도 임진왜란 이후에는 첫째 며느리의 경우에는 1년상을, 둘째 며느리의 경우에는 9월상을 치르는 쪽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이런 상황 하에 인선왕후의 장례에 있어서 9월상을 주장한다는 것은 곧 인선왕후를 둘째 며느리로 보겠다는 것이요, 이는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한다는 명확한 입장 표명이 딸려 나오게 된다. 앞서 기해예송 때에는 경국대전이라는 논리적 도피처의 존재 때문에 '1년상 주장 = 효종은 차자'라는 등식이 성립될 수 없었다. 그러나 갑인예송 때에는 '9월상 주장 = 효종은 차자'라는 등식이 명백히 나오기에, 어느 상을 주장하느냐에 따라 효종에 대한 그 사람의 인식이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9월상을 내세운다는 것은 곧 효종은 애당초 왕위에 오를 수 없었던 둘째 아들이요, 이는 현재 임금인 현종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었기에, 서인 내부에서도 9월상을 당론으로 결정할 것인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사대부의 위신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은 갑인예송 때에도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이번에도 서인의 당론은 9월상으로 확정되고 말았다. 이는 왕가의 특수성을 대놓고 깔아뭉개는 처사였기에, 현종은 대노(大怒)하게 된다.
기해예송이 '서인 대 남인' 간의 대결 구도였다면, 갑인예송은 주로 '서인 대 현종' 간의 논쟁으로 흘러갔다. 갑인예송 당시 현종은 기해예송 때처럼 더 이상 어리바리한 임금이 아니었다. 나이도 제법 들었고, 정치적 능력 또한 즉위 때보다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특히 기해예송으로 서인이 15년 동안 권세를 누리는 정치판을 보며, 지금의 정세를 뒤엎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다. 왕권 견제에 앞장섰던 송시열의 세도를 안 그래도 못마땅해 하던 현종이었는데, 갑인예송을 계기로 신하들이 이처럼 대놓고 왕의 체면에 먹칠을 해버리니 임금으로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처음에는 서인 내 임금 옹호파 및 남인의 힘을 빌려가며,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주류 세력을 말로 설득해보고자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이 계속 9월상을 내세우자,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현종은 결국 직권으로 1년상을 선포해버린다. 그러고는 서인들을 정계의 중심에서 쫓아낸 뒤 기해예송 때 좌천됐던 허목 등의 남인 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그 자리를 채우게 하니, 1623년 인조반정 이후 50년 넘게 정권의 1인자 자리를 놓치지 않았던 서인은 이 일로 인해 그 권력을 남인에게 넘겨주게 된다. 송시열 또한 현종의 분노를 피할 수 없었기에, 함경도 덕원(德源)으로 유배길을 떠난다. 10년 넘게 임금 노릇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 사이에서도 그 존재감이 미미한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 어쩌면 갑인예송 때 벌였던 그의 이러한 작업이 재위기간 15년을 통틀어 가장 대담하고 활동적으로 펼친 일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제 겨우 임금다운 목소리를 내나 싶더니만 현종은 그해 8월에 갑작스럽게 승하하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세자 순(焞)이 왕위를 계승하니 이가 곧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 되는 사람이다.
현종의 갑작스런 승하는 남인에게는 두려움을, 서인에게는 안도감을 안겨주었다. 드디어 2인자의 설움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아직 그 권력이 탄탄하지 않은 남인이었기에 한동안은 왕권과의 공조가 필수적이었는데, 자신들을 지지하던 현종이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그들로서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록 중앙 정계에서 대거 축출당했다고는 하나 서인의 영향력은 여전히 강하였기에, 서인이 이러한 학문적 · 정치적 권위를 앞세워 새 임금을 강하게 압박한다면 판세는 금방 뒤집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남인의 우려대로, 실제로 서인은 숙종의 즉위를 반격의 기회로 삼고자 하였다. 서인은 자신들이 새 임금을 쉽게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법도 한 게, 일단 당시 숙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겨우 14세였다. 또한 그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서인 세력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영수가 바로 임금조차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정도로 그 권위가 막강했던 송시열이었기 때문이다. 안에서는 명성왕후, 밖에서는 송시열을 통해 풋내기 임금 숙종에 대해 압력을 가한다면 머잖아 권력은 다시 자신들의 것이 되리라는 것이 서인의 계산이었다.
이러한 의도 하에 서인이 벌인 일이 바로 숙종의 친정이었다. 이미 선조가 16세의 나이로 수렴청정을 받았던 전례가 있었기에, 그보다도 어린 14세의 나이에 즉위한 숙종이 수렴청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위한 섭정을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볼 수 있으나, 어째서인지 서인은 숙종이 수렴청정을 받지 않은 채 스스로 정사를 돌보게끔 만들었다. 서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행동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자의대비, 즉 장렬왕후의 존재였다. 장렬왕후가 속한 양주조씨 가문은 원래 서인에 속하였으나, 서인 내부에서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는 남인으로 돌아선 집안이었다. 만약 숙종이 수렴청정을 받게 된다면 그러한 섭정의 주체는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장렬왕후가 맡을 것이고, 이는 곧 남인의 집권을 튼튼히 다지는 길이었기에 서인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남인 세력인 장렬왕후의 손길이 숙종에게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숙종으로 하여금 친정케 하는 것이 서인에게 있어 최상의 방법이었다.
또한 서인은 숙종의 친정이 그 어미 되는 사람인 명성왕후의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높일 수 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명성왕후는 서인들조차 내심 우려를 품었을 정도로 그 성격이 괴팍한 여인이었다. 현종이 살아생전 후궁을 단 한 명도 두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러한 명성왕후의 거친 기질 때문이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그녀는 당시 궁중 여인네들은 물론 일반 남성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소위 '한 성깔'했다. 오죽하면 남인이 그녀를 '제2의 문정왕후'라고 비꼬았을까. 어쨌든 명성왕후는 정치적 라이벌 관계인 남인을 꺾기 위해서라면 정치 간섭도 불사할 만큼, 서인의 위신 향상을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서인은 이러한 명성왕후가 숙종에 대해 보다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끔, 숙종의 친정을 강하게 내세웠던 것이다. 실제로도 명성왕후는 1675년 남인과 가까이 지냈던 왕족들을 무고한 '홍수(紅袖)의 변'을 일으킴으로써 아들 숙종의 정치에 깊숙이 간섭하였으며, 이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창 국사가 논의되던 정청(政廳)에 느닷없이 들이닥치고는 대성통곡하기까지 하였다. 또한 자신보다 서열이 위였던 대왕대비 장렬왕후와도 사사건건 대립각을 세웠는데, 숙종과 장렬왕후의 총애를 받고 있었던 남인가(家) 여인 장옥정을 궁 밖으로 내친 일이 대표적인 예였다. 이와 같이 명성왕후는 남인 축출을 위해 모든 힘을 쏟은 인물이었고, 서인으로서는 이런 명성왕후를 내세우면서 현 상황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비록 당시 정권은 남인의 것이었으나 여전히 강한 서인의 영향력, 대담한 성격의 소유자 명성왕후의 입김, 그리고 누구보다도 숙종 본인부터가 친정을 열망했기에 1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수렴청정 없이 곧바로 친정을 단행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서인들의 계산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들이 딱 하나 잘못 판단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숙종의 그릇이었다.
서인의 이러한 오판이 사실 무리가 없었던 게, 일단 숙종은 병약한 체질로 인해 왕세자 시절부터 각종 지병을 앓고 있었다. 게다가 남자 형제라고는 자신밖에 없었으니, 안 그래도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명성왕후의 치맛폭 속에 더욱 깊숙이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명성왕후는 유일무이한 아들이었던 숙종을 애지중지하며 키웠는데, 이와 같은 지나친 관심이 때로는 숙종에게 있어 거대한 부담감으로 작용될 수 있음을 서인은 잘 알고 있었다. 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어린 임금 숙종은 어머니 명성왕후에 의해 이리 저리 휘둘리다가 얼마 안 있어 숨을 거둘 나약한 임금이었던 것이다.
송시열 유배, 남인집권 공고화, 허목과 허적 간의 갈등, 경신환국 및 남인 축출, 허목 사망 및 송시열과 윤증 간의 갈등, 기사환국 및 서인 축출되고 송시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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