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그만 파야…묻혀 있으면 영구보관될 유물이 파 내놓으니 마멸되잖아”
김용만옹이 황룡사터의 탑지에 있는 심초석(心礎石)을 가리키며 “이 안에서 사리암 등 유물이 나왔다”고 말했다. |
군대에 있을 때 부친이 구황동에 있는 황룡사지 터로 이사를 갔다. 당시 황룡사지 터는 60호 정도가 거주하는 부락터였다. 황룡사지 복원을 위해 1년에 30호씩 2년에 걸쳐 철거를 했다. 그 무렵, 진흥섭 이화여대 교수가 발굴 인부가 필요하다고 마을을 찾았다. 인부로 참여한 마을 사람 몇명 가운데 김옹도 끼었다.
그후부터 40년간, 황룡사터·공주 송산리 고분군·안압지·황남대총·월성해자·익산 미륵사지 등 전국의 유적 현장을 다니면서 그야말로 ‘발굴 인생’을 살았다. 1973년 천마총을 발굴하면서부터는 ‘작업반장’의 직책을 맡아 한국고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김옹은 지난 7일 열린 ‘제8회 대한민국 문화 유산상’에서 보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유적 현장의 발굴 인부로서는 처음으로 받는 상이었다.
“한달 전부터 수상에 대한 얘기는 들었어도 ‘나 같은 게 뭐. 쓸데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 훈장 받기 2~3일 전부터는 온갖 매체에서 찾아와서 천마총·안압지 등으로 돌아다니면서 인터뷰를 했어. 그때 ‘아, 이제 참말인가보다’ 싶었지. 받는다고 생각도 안 했는데, 모두 고고학 선생님들이 성심으로 지도해주고 아껴준 덕분이지.”
지난 13일 경주 분황사 앞에서 만난 그는 수상을 축하한다는 인사에 겸손의 말로 응대했다. 이어 “이렇게 기자들이 찾아올 줄 알았으면 발굴 현장에 참가했던 연도도 적어두고, 발굴현장을 기록해둔 일기도 버리지 않았을텐데…”라며 아쉬워했다.
우리는 분황사 바로 옆에 위치한, 그의 손길이 스며있는 황룡사지 초석 위에 걸터앉아 인터뷰를 시작했다.
“따시니까(따뜻해서) 좋다.”
겨울인데도 햇살이 눈부시게 얼굴에 내려앉는 오후였다.
천마총 발굴 당시 흙을 걷어낸 후 적석 앞에서 찍은 사진. <김용만씨 제공> |
-보관문화훈장 수상 소식이 전해지고 축하인사도 많이 들으셨죠. 수상 후 6일이 지났는데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나요.
“매일 전화가 많이 와서 밖에 나가지를 못했어요. 휴대폰으로도 오지만, 집전화로도 전화가 계속 오니…. 사촌이 12명이거든. 조카들이랑 얼마나 많겠어. 어제부터는 덜해요.”
-가족들 반응은 어땠습니까.
“집사람이 왜 상금은 없느냐고 하더라고. 박사 몇 분은 1천만원씩 받았는데 나는 목에 거는 휘장만 받았어요. 그러니까 사위가 ‘장모님, 돈보다는 이게 더 낫니더. 이 휘장은 2천만원도 줄라칼기니더’라고 말해서 한바탕 웃었어요.”
◆30대 후반 문화재 발굴 시작
-진흥섭 이화여대 교수의 권유로 처음 발굴작업에 참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후 그만둘 수도 있었을 텐데, 발굴작업인생 40년을 사신 걸 보면 발굴에 매력이 있었나봅니다.
“발굴에 참여해본 사람이니까 다음에도 같이 하자고 해서 인연이 됐는데…. 꼭 내 체질에 맞더라고. 아주 중노동도 아니고, 흥미도 나고 취미가 붙더라고요. 유물 나오는 게 관심이 가고 신기했지요. 토기나 기와 등 특이한 유물이 나오면 다음엔 뭐가 더 나오려나 싶어서 열심히 하게 되고….”
-다른 일을 하려고 시도해본 적은 없습니까.
“당시에 우리 마을에는 전부 농사짓는 사람들인데, 나는 농사지을 줄도 몰랐어요. 부모님 덕택으로 어릴 때부터 농사를 안 지었지요. 발굴이 나한테 맞고 즐거워서 다른 일을 하려고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처음 발굴 현장에 참여한 곳은 어디입니까.
“(인터뷰하면서 기자들이) 연도를 자꾸 물어보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적어놓을 걸…. 망득사와 모전석탑지 중 하난데, 어느 걸 먼저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발굴작업에 참여했던 유적지는 몇 곳입니까.
“천마총·첨성대·계림·안압지·월성해자·황룡사·분황사 등 35~36군데 됩니다.”
(발굴작업을 한 유적지에 관한 얘기를 나누던 중, 김 옹은 ‘경주 보문동 석실분’을 언급했다.)
“귀족 무덤일 거요. 봉분을 파내려가다보니 뻐끔 구멍이 뚫려 있더라고. ‘아이쿠, 파이다(별로다). 도굴당했구나’ 싶대. ‘연도’라고 출입하는 길을 만들어놓은 무덤이 있거든요. 연도는 남쪽으로 나있어요. 남쪽으로부터 파들어가보니 연도가 있대. 문짝을 돌미닫이로 만들어놨더라고. 무덤 안에는 회칠이 하얗게 돼 있고, 석침(돌베개)과 족침(주검의 발을 괴는 데 쓰던 받침)도 있었어. 싹 다 가져가버리고 아무 것도 없더구만.”
-발굴하다가 도굴당한 걸 보면 마음이 휑하셨겠습니다.
“참 허전하지요. 여름에는 땀을 얼마나 흘리고 발굴하는데…. 유구가 텅 비어있으면 지금까지 한 게 아깝고 그렇지요. 경주 방내리와 안계리 고분군은 10개 중 5군데 이상이 도굴해간 곳이었어요. 경주 시내는 도굴을 못해갔고….”
천마총 발굴 때부터
출토유물 누설 금지 입 열면 야단났었지
기자들 사진 찍으 돈으로 인부 회유도
朴대통령 방문 때는 인부 다치는 불상사
모두 36곳 발굴 참여 한땐 가정에 신경 꺼
매일 소주 마시기도
발굴 일기도 썼지만
있으면 뭐하나 싶어 몇해전 다 불살라
지금은 좀 후회돼…
◆발굴 그리고 천마총
-50년 발굴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은 천마총인가요.
“그렇지. 무덤 정상에서 1m 안되게 파내려가면 마구가 있어요. 처음에는 몰랐다가 넘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문화재를 발굴하는 데는 보통 얼마나 걸립니까.
“짧게는 며칠 걸리고, 길게는 몇년 걸려요. 천마총은 속성으로 해서 그래도 빨리 끝마친 겁니다. 그때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했지. 요즘 표토층은 포클레인으로 위의 흙을 걷어내는데…. 예전에는 장비가 없었을 뿐 아니라 일체 장비를 못쓰게 했어요. 삽·호미를 쓰다가 유구층(遺構層)에 들어가면 붓 등을 사용했지요.”
-전부 손으로 하셨겠네요.
“그렇지. 장갑도 거의 없었어요. 어쩌다 장갑 하나 구할까 말까 했다니까.”
-천마총 발굴할 때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좀 들려주세요.
“천마총 발굴할 때 굉장히 가물었다고 기억해요. 여름인데 농번기는 다가오고 비가 안 와서 경주 시민들이 봉황대(예전에 경주에 있는 신라 때의 무덤을 이르던 말) 파서 비 안온다는 얘기도 많이 했어요. 유구층에 다 들어가서는 무덤 전체를 천막으로 덮어씌웠거든. 기자들이 그 안을 한번 보고 사진 찍어가려고 굉장히 몰려들었어요. 돈으로 인부를 회유하기도 했다더라고. 기자들이 워낙 들어오려고 하니까 고분 들어오는 초입과 봉분가에 문지기를 세우기도 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오셨는데 그날 천막을 걸치려고 세워둔 두꺼운 나무 막대기가 바람이 불어서 넘어지는 바람에 인부가 다쳤죠. 머리를 맞았으면 큰일이 났을텐데 다행히 어깨 쪽을 맞았지. 대통령 들어오는 길 반대방향으로 인부를 들쳐 업고 병원으로 내달렸어요. 박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금일봉을 주고 가셨어. 우리 일꾼에게도 나눠주더라고. 얼마 받았는지는 기억이 안나요.”
-인부로 일해서 받는 월급은 어느 정도였습니까.
“얼마 못 받았어요. 천마총 할 때는 특수인부라고 해서 노임을 많이 줬어요. 일반 노가다보다 많았지. 나는 인부로 일하면서 부친께 물려받은 논에 일꾼 들여서 농사를 지어서 생활했어요.”
◆만날 술을 마셔서…
-발굴현장에 다니려면 집에 못 가는 경우도 잦았겠습니다.
“공주가서는 3개월 있다가 집에 한번 다니러 왔는데, 대장에 구멍이 나서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어요. 만날 술을 마셔서…. 익산 미륵사지 발굴할 때는 6개월 현장에 있으면서 집에 2~3번 갔지요.”
-유물 나오면 좋아서 마시고, 도굴해간 흔적이 있을 때는 아쉬워서 마시고 하셨나봅니다. 주량은 어느 정도셨어요.
“발굴현장 있을 때는 매일 소주를 마셨어요. 젊었을 때는 소주 한병 정도 마셨고, 요즘은 반병이면 돼요.”
-집에 자주 못 들어가서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네요.
“미안했지요. 그런데 천마총 발굴할 때는 솔직한 말로 가정은 아무 상관 없었다고. 발굴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제일 어려웠던 발굴 현장은 어디였습니까.
“월성해자(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을 둘러싸고 있던 해자 시설의 일부를 정비한 것. 해자란 성의 둘레를 감싸듯 돌아가게 판 후 그 안에 물을 담아 적이 쉽게 성 안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방어시설)였습니다. 뻘을 만들어놨으니까 작업하는 데 힘이 많이 들었지요. 인부들이 다리가 긴 삽을 집에서 만들어와서 작업을 했다고. 짧은 삽으로는 마른 땅에서 작업을 못하니까. 나야 뭐 반장이라서 작업은 안했지만…. 흙이 삽에 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고 해서 힘든 점이 많았죠.”
◆문화재 발굴에 있어 중요한 건 유물
-문화재 발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유물입니다. 유물은 도난 당할까봐 걱정이고, 파손될까봐 걱정이지요. 천마총 발굴 때부터는 출토유물에 대한 얘기를 일체 못하게 했어요. 어디가서 얘기하면 야단이 났다고. 또 인명사고 날까봐 제일 걱정이고…”
-성격이 꼼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반장님도 꼼꼼하셨을 것 같은데요.
“나도 꼼꼼했지요. 안압지 발굴할 때부터인가는 유물이 나오면 유물카드를 만들었어요. 날짜, 이름, 크기, 출토 위치를 적고 그림도 그렸어요.”
-발굴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하신 적은 없습니까.
“감은사지, 익산 미륵사지 발굴할 때는 일기처럼 기록해둔 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해 전에 다 불사질러 버렸어요. 집에 두면 뭐하나 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놔뒀지.”
-경주는 모든 땅이 박물관이라고 하잖아요. 아직도 땅속에 묻혀있는 유물이 굉장히 많을텐데요. 유물을 땅속에 그대로 두는 게 낫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경주는 땅 밑에 묻힌 게 지상보다 많다는 얘기를 합니다. 큰 무덤은 파면 왕릉이라는 걸 유적을 발굴해보고 알게 됐잖아요. 이제는 더 이상 많은 유적지를 파지 않으면 좋겠어요. 묻혀 있으면 영구 보관되는 건데 파서 내놓으면 마멸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천마도는 자작나무껍데기 위에 그림을 그린 거라고 하더라고. 태양이나 외부 공기를 쐬면 금방 마멸된대요. 합(그릇)도 옻칠해 그림 그려놓은 건 외부 공기 쐬면 금방 마멸되죠. 묻혀있는 것보다 밖에 나오면 손실이 많지 않나 싶어요.”
◆김용만= 경주 양북면 출생으로 호적상 31년생(실제론 30년생).
1945년 경주 양북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6년 경주 방내리 고분군과 69년 경주 안계리 고분군, 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 73∼74년 경주 천마총(155호 고분)과 황남대총(98호 고분), 75∼76년 경주 안압지·월성해자·황룡사지, 80∼96년 익산 미륵사지 발굴 등 우리 역사를 대표하는 굵직한 발굴현장에 40년 인생을 바쳤다. 2006년에는 만 75세 연령제한 때문에 발굴현장을 떠났다. 김옹은 문화유산 보호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7일 열린 ‘제8회 대한민국 문화 유산상’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글·사진= 박주희기자 j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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