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인왕동 양지마을은 경주 남산의 북쪽 끝자락과 국립경주박물관 사이에 위치한 30여 호 규모의 아담한 시골마을이다. ‘마지막 신라인’ 고청 윤경렬 선생이 이 마을에 터를 잡은 것은 한국전쟁 직후의 일이다. 함경북도 주을이 고향인 윤 선생은 1949년 경주에 정착했다. 전쟁으로 잠시 경주를 떠났다가 이 마을에 다시 터를 잡고, 1972년 지금의 한옥을 손수 지어 1999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을 보냈다.
원래 조각을 공부했던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남북분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유린되고 외면당하는 민족문화의 현실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평생을 바쳐 전통조각과 경주남산 연구, 그리고 경주 어린이들에게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과 자긍심을 일깨우고 가르치는 데 헌신해 왔다. 특히 초대 경주박물관장 진홍섭 선생과 의기투합해 1954년 처음 시작한 ‘경주어린이박물관학교’는 지금껏 이어오면서 우리나라 어린이 박물관 교육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도 남아있는 인왕동 양지마을의 세 칸짜리 작은 한옥과 그에 딸린 작업실은 그러한 선생의 땀과 노력들이 고스란히 깃든 유서 깊은 공간인 셈이다.
윤경렬 고택 보존에 담긴 뜻
2010년 당시 이건무 문화재청장의 제안으로 윤경렬 선생의 집을 찾아보았다. 1999년 선생이 돌아가시고 빚 담보로 소유권마저 남에게 넘어간 뒤, 이 집의 운명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선생이 손수 지은 한옥은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눈물나게 고마운 일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활동이 이뤄지던 한옥에 딸린 선생의 작업실은 이미 폐가가 된 지 오래였다.
평생 사재를 털어 민족문화 연구와 보급에 헌신하신 선생이었지만, 정작 그러한 선생의 노고가 깃든 옛집이 처한 실상은 우리 모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다행히 2010년말 선생의 여러 제자들과 뜻 있는 기업의 후원으로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이 집을 매입해 되찾아 올 수 있었다. ‘문화유산과 자연환경자산에 관한 국민신탁법’에 근거해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모두가 함께 기억해야 할 뜻 깊은 공간으로 가꾸어 가고자 힘과 지혜를 모으고 있다.
흔적과 기록이 없으면 기억도 없는 법. 윤경렬 선생의 양지마을 옛집은 보전가치가 크지만 방치된 다른 옛집들에 비하면 그나마 행복한 결말에 속한다. 우리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할 20세기 인물들과 관련된 공간들은 그간 제대로 된 실태파악조차 없이, 무수히 멸실돼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고 있다.
문화재의 미래가치 파악해야
이런 일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문제는 이러한 집들이 지니는 ‘가치’에 비해 이를 보전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한계가 너무나 크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예산배정도 불가능하다. 문화재보호법의 경우 지정 또는 등록제도를 두어 보존가치가 큰 것들을 법정 문화재로 영구보존하고 있지만,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적어도 50년 이상의 연한이 된 것들에 한해 지정 또는 등록 대상으로 삼는다. 때문에 장차 예비 문화재로서 가치가 큰 것들이 있더라도, 현행 문화재보호법으로는 법적 보존의 근거를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미래의 예비 문화재로서 잠재적 가치가 큰 것들을 목록화하고, 이를 매입하거나 기증받아 영구보전하려는 업무가 문화유산국민신탁과 같은 기구의 설립 취지와 활동영역임은 분명하다. 그에 따른 정부기관과 민간기구의 긴밀한 협력도 진행중이다. 그에 앞서 우리 스스로가 진지하게 되묻고, 주위를 둘러봐야 할 때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물려줄 것인가?”
강임산 문화유산국민신탁사무국장
2012.03.28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