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불교-재조대장경
무인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231년. 고종 즉위 18년째 되던 해 몽골의 강력한 군대가 고려 를 침략했다. 최씨 무인정권은 처음에는 강화조 약을 체결하며 몽골의 요구를 수락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로 수도를 옮긴 후 30년 가 까이 몽골과 항전을 했다.
고종 46년(1259년) 고려가 항복할 때까지 수많 은 군대를 파견한 몽골은 고려 전역을 유린했다. 이때 소중한 문화유산이 대거 불에 타거나 약탈 을 당했는데,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 조대장경>도 몽골군의 방화로 한줌 재가 되고 말았다.
몽골에 맞선 고려 정부는 외침을 극복하고 민심 을 수습하는 한편 불력(佛力)의 도움을 받기위해 또 다시 <대장경> 제작 불사에 들어갔다. 이때가 고종 24년(1237년)이었다.
몽골 침입후 ‘대장도감’ 설치
불법으로 합심해 ‘외침 극복’
비서성판사와 문하시랑평장사, 감수국사 등 요 직을 두루 거친 이규보는 임금을 대신해 ‘대장각 판군신기고문(大藏刻板君臣祈告文)’이란 글을 지어 <대장경> 제작 이유를 밝혔다. 줄여서 ‘군 신기고문(君臣祈告文)’이라 불리는 이 글은 <동 국이상국집>에 실려 있는데, 대장경을 조성하며 제불보살에게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일부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시방의 한량없는 제불보살과 천제석(天帝釋)을 수반으로 하는 33 천의 일체 호법영관(護法靈官)에게 기고(祈告) 합니다. … 원하옵건데 부처님과 여러 천신들은 이 간곡한 정성을 굽어 살펴주십시오. 신통한 힘 을 빌려 주시어 오랑캐들을 멀리 쫓아내 다시는 우리 국토를 짓밟는 일이 없게 해 주시고, 전쟁 이 그치어 나라가 편안하며 국운이 만세토록 유 지되게 해 주십시오.”
이때 제작한 대장경이 <재조대장경(再雕大藏 經)>이며, 조정에서는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 치해 <대장경> 판각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대 장도감은 강화에 본사(本司)를 남해에 분사(分 司)를 두고 본격적인 대장경 제작에 들어갔다. 본사와 분사를 모두 섬에 둔 것은 바다에 약한 몽골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재조대장경> 제작은 고종38년(1251년) 회향했 다. <재조대장경>에는 1496종 6568권(639함)의 불경이 포함됐다. 이전의 <대장경>에 비해 500 여권 이상이 늘어난 것으로, 완성된 대장경판은 8만1137개이다. 경판 한 개당 양쪽에 경전을 새 겼으므로 인쇄하면 모두 16만장(면)이 넘는 대 작불사였다.
완성된 <대장경>은 강화도 대장경판당에 보관 하다, 조선 태조 7년(1498년) 합천 해인사로 옮 겨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 <대장경>은 근대 이 전 동아시아에서 만든 <대장경> 가운데 유일무 이하게 판본이 온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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