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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 통일을 이룬 신라의 천년 도읍지 경주가 황룡사 복원으로 또 다시 용틀임을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등 삼국 중 최약체로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통일국가를 이룩함으로써 한국문화의 원형을 태동시켰다. 신라의 이러한 저력은 현재의 경주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만 후손들이 제대로 인식을 하지 못하고 활용을 하지 않아 잠들어 있는 것 같이 보일 뿐이다.
아득한 옛날 신라는 세계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황룡사 9층탑과 웅장한 월성, 당시로서는 최첨단을 자랑했을 천문관측대인 첨성대, 불국토 남산, 불국사, 불교조각의 백미 석굴암 등을 축조했다. 그 성과물들은 수천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자리에서 당시의 당당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신라의 삼국통일은 한민족을 하나로 묶어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한반도 역사의 중심이었던 경주가 고려와 조선을 거쳐오면서 역사속에서 소외된 것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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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 '정신적 복원' 서둘러야
'신라의 중심'이자 '세계의 중심'임을 만방에 알린 거대한 가람이었던 황룡사는 신라시대 최대의 사찰이자 삼국통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국가사찰이었다.
9층목탑과 장육존상 등 거대한 탑과 불상은 상상을 초월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당대의 고승인 원효스님이 백고좌법회를 하며 강론을 하는 등 통일신라의 정신적 기반이기도 했다. 경주시는 몽고군에 의해 불타고 없어진 9층목탑과 금당 등의 복원을 서두르고 있다.
최근 경주에서 황룡사 복원 연구 포럼이 열렸다. 연구자들은 한결같이 9충목탑과 금당 등 가람배치에 관한 사찰 외형에 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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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가 그 당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인문사회학적인 고찰은 없었다. 그래서 황룡사는 건물복원도 중요하지만 정신적 복원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대두됐다. 황룡사가 창건될 당시 신라는 통일전쟁을 수행하면서 호국불교가 성행했다. '호국'(護國)은 곧 '불국토'(佛國土)라고 여겨온 '국토를 수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불국토는 어떤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유린돼서는 안되고 이러한 불국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다. 이 정신적 지주가 황룡사에서 원효를 비롯한 고승들에게서 나왔다.
그래서 황룡사는 그 시대를 지탱하는 '철학적 담론'을 생산하는 '거대한 지식창고'였다. 통일전쟁으로 수많은 살상과 생과 사를 경험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의 삶을 보듬기 위해서는 불교가 최고의 피안이었다. 현재는 비록 황폐하지만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삶이 보장된다는 불교적 사고가 민중들에게 삶의 버팀목이 돼 주었다.
특히 최초의 한반도 통일로 한민족을 이룬 통일신라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부처님의 세상을 구현하는 불국토라는 자부심이 힘든 현실을 잊게 하고 역사를 진보하게 했다.
이러한 간절한 염원이 담긴 거대한 정신세계를 배제한 채 외형 복원만 서두르는 것은 제고해야 한다. 특히 황룡사 복원이 단지 '관광중심'으로 복원돼서는 안되고 그 시대 정신세계를 아우를수 있는 가람 복원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황룡사의 상징 9층목탑
넓은 대평원을 연상케하는 경주시 구황동의 황룡사지는 한눈에 봐도 신라 천년고도 서라벌의 중심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황룡사지 남쪽엔 궁궐인 월성과 불국토 남산, 서쪽엔 선도산, 동쪽엔 명활성, 북쪽에 소금강산이 위치해 사방에서 중심으로 향하는 기(氣)가 온몸에 전율을 일으키며 전해져 온다.
황룡사가 신라 대표 사찰이었던 것은 황룡사에 신라 3보(三寶)인 '9층 목탑'과 '장육존상', '진흥왕 선사옥대'가 있었던 것이 증명해 주고 있다. 그 중 9층탑은 높이가 80여m에 이르고 각 층마다 일본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의 복속을 기원할 만큼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원대한 꿈이 서려 있음을 알 수 있다.
9층탑의 정면과 측면은 모두 일곱칸으로 한 변의 길이가 22.2m인 사각평면으로 바닥의 면적은 500㎡에 이르렀다. 높이는 183척(약 65m), 상륜부가 42척(약 15m), 합해서 225척(80m)의 웅장한 규모였다.
신라는 이 탑을 세우면서 각 층마다 한 나라씩 조복(調伏) 되기를 기원했으며 1층부터 일본, 중국, 오월(吳越), 탁라(托羅), 응유(鷹游), 말갈, 단국(丹國), 여적(女狄), 예맥 등 이었는데 그 순서로 보아 신라의 적국(敵國)의 세력의 크기를 알 수 있다.
이 탑은 643년(선덕여왕 12년)에 시작돼 2년 후인 645년에 완성됐으며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 됐다. 탑은 완성된 지 50년 뒤인 효소왕 7년(698년)에 벼락을 맞고 불에 탄 이래 다섯 차례의 중수(重修)를 거듭했다는 사실이 경문왕 13년(873년) 탑을 재건할 때 만들어 넣은 사리함 내의 찰주본기(刹柱本紀)에 기록돼 있다. 이후 593년간 이어 내려오다가 고려 고종 25년(1238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가람 전체가 불타버린 참화를 겪은 뒤에는 중수되지 못하고 현재까지 터만 전해져 오고 있다. 목탑의 모형은 인근 남산자락 탑곡마애조상군에 새겨진 탑의 모습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장육존상-신라인 '절대적 존재'
황룡사의 9층탑이 대외적으로 '신라의 위상'을 표방하는 대표적 상징물 이었다면 금당의 장육존불(丈六尊佛)은 내적으로 그 성취를 기원하는 대상인 '절대적 존재' 였다. 따라서 장육존불은 신라인들에게 꿈을 이뤄주는 대상으로 존재했다.
황룡사터의 금당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금당의 중앙에 남아있는 금동삼존장육상 3개의 대석을 중심으로 좌우에 십대제자상과 신장상 2구를 배치할 수 있는 대석이 남아 있다. 대석은 자연 그대로 생긴 바위 윗면을 일단 편평하게 고른 뒤 장육상을 고정시키기 위해 촉이 들어가게 홈을 파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켰다.
장육불상이란 석가(釋迦)의 키가 1장6척이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불상은 574년(진흥왕 35년)에 주조된 것으로 인도의 아쇼카왕이 철(鐵) 5만7천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삼존불을 주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배에 실어 바다에 띄우고 인연있는 국토에 가서 장육존상으로 이뤄질 것으로 발원했으며 1불과 2보살의 모형까지 실어 보냈다. 이 배가 울산만에 도착하자, 금과 철을 동축사(東竺寺)에 모셔두고 있다가 경주로 실어와 장육상을 주조했는데 무게가 3만5천700근에 황금 1만136푼이 들었고 두 보살은 철 1만2천근과 황금 1만136푼이 들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금동으로 삼존불을 만들고 이 삼존불을 모시기 위한 금당을 10년 후인 584년(진평왕 6년)에 세웠다.
▲황룡사 대종
황룡사에는 성덕대왕 신종(일명 에밀레종)보다 4배가 넘는 대종(大鐘)이 있어 가람의 규모가 얼마나 웅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종으로 불리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크고 뛰어난 대종의 종소리는 어떠했을까? 아마도 신라인의 심금을 울려주는 '희망의 종소리' 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의 종은 무게가 49만7천581근이나 되는 거대한 것이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 신종보다 4배가 넘는 셈이다. 또한 이 종보다 17년 앞선 754년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몽고군이 탐을 내어 종을 동해까지 옮겨 배에 실었으나 무거워서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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