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관련자료

사천왕사(四天王寺)

박근닷컴 2012. 11. 22. 23:55

[유홍준의 국보순례] [39] 사천왕사(四天王寺)

  • 입력 : 2009.12.24 02:08
 

얼마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주 낭산(狼山) 아랫자락 사천왕사(四天王寺) 터에서 또 조그만 금동불상을 발견하였다. 사천왕사는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적인 사찰로 그 역사적, 미술사적 의의는 가히 기념비적인 것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그 창건 과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통일전쟁이 끝났는데도 당나라는 물러가지 않고 공주에 웅진도호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눌러앉으려 하자 신라는 고구려·백제 유민들과 함께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당 고종은 신라를 치기 위해 외교사절로 가 있던 김인문(金仁問)을 옥에 가두고 50만 군사를 조련시켰다.

이때 당에 있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찾아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귀국해 왕에게 아뢰었다. 이에 조정에서 긴급 대책을 논의하던 중 명랑(明朗)법사는 낭산 신유림(神遊林)에 사천왕사를 지으라고 권했다. 대대적인 호국불사를 일으키며 당나라와 일전불사의 의지를 다지라는 뜻이었다. 이리하여 사천왕사는 문무왕 11년(671)에 짓기 시작했고, 결국 676년에 당나라 군대를 한강 유역에서 격파하며 완전히 몰아냈다. 사천왕사는 착공 8년 뒤인 679년에 완공됐다.

이렇게 세워진 사천왕사의 가람 배치는 전에 없던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이었다. 왜 이때 갑자기 쌍탑이 등장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똑같은 탑 두 기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건축적 리듬감을 얻어낸다는 아이디어는 탁월한 구상이었다. 현대 건축에서 쌍둥이 빌딩이 추구하는 그런 건축 미학이었다. 사천왕사에서 시작된 쌍탑 가람 배치는 이후 감은사·불국사를 비롯한 통일신라 사찰의 기본 틀로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으로 전해져 8세기 하쿠오(白鳳)시대에 야쿠시지(藥師寺) 같은 쌍탑 가람으로 나타났다. 동양미술사가인 페놀로사는 이 쌍탑의 실루엣을 바라보면서 '얼어붙은 소나타(sonata)' 같다고 했다.

이렇게 중요한 절터이건만 일제강점기에 경주에서 불국사역으로 가는 철길을 바로 이 사천왕사 터를 질러 내는 바람에 제대로 발굴조차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 철길은 3년 뒤 완전히 철거될 예정이라고 하니 그때 사천왕사 터에 가서 쌍탑을 상상해보면 이번엔 '얼어붙은 심포니(symphony)'를 연상하게 되리라고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