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대왕전설의 형성과 변모
전 신 재 (한림대 명예교수)
1. 문제의 제기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의 김부대왕제는 소를 잡아서 제물로 쓰고, 제의 후에는 마을 대항 돌싸움[石戰]을 벌일 정도로 성대한 잔치였다. 그런데 이 제의는 현재 전승이 끊어졌다. 1997년 음력 5월 5일(양력 6월 10일), 김부리에서 이사해 나갔지만 김부리의 밭이 팔리지 않아 가끔 들르곤 하던 윤씨 내외 두 사람이 쓸쓸하게 올린 김부대왕제, 그것이 마지막 김부대왕제였다. 이제 이 세상에 김부리 김부대왕제는 없다. 김부리는 1993년에 종합전술훈련장으로 국방부에 매각되었다. 지금 김부리에는 민가가 없다. 황량한 벌판에 김부대왕을 모셔놓은 대왕각만 외롭게 서 있다. 아무도 대왕각에는 손을 대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군인들은 제사를 지낼 줄을 모른다. 다만 김부대왕의 후손이 일년에 한 번씩 찾아올 뿐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김부대왕의 전설을 추적한다. 추적하는 방법으로는 김부대왕전설군(群)에서 김부리 김부대왕전설이 차지하는 위치를 확인함으로써 김부리 김부대왕전설의 실체를 파악하는 방법을 취한다. 김부대왕전설은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지역에 따라서 유형이 다르고, 같은 유형에서도 각편이 다양하다. 특히 김부리의 경우는 전설의 증거물들의 주인이 김부대왕이냐 마의태자이냐의 문제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김부리의 전설만을 대상으로 하여 분석하는 것보다는 다른 지역의 전설들과 함께 살피면서 김부리 김부대왕전설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안전한 방법일 것이다.
김부대왕 설화를 전반적으로 다룬 연구로는 김용덕의 연구가 있다. 그는 김부대왕 설화를 호국룡형과 신격형으로 나누어서 고찰하면서 핵심형이 변이형으로 변모하는 양상, 전설이 신화로 변모하는 과정, 조상숭배사상이 공동체 신앙으로 발전하는 과정 등을 밝혀내었다. 그의 연구는 김부대왕전설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필자는 한편으로는 김용덕의 연구를 수용하면서 필자 나름대로의 체계를 달리 세워 보았다. 필자는 김부대왕전설을 미륵신앙, 무속신앙, 조상숭배의 세 측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하였다. 그리고 전설이 신화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신화가 퇴색하여 전설로 변모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조상숭배가 공동체 신앙으로 발전하였다기보다는 조상숭배와 공동체 신앙이 계속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김부(金傅, ? -978)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의 본명이다. 본관은 경주.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견훤의 공격을 받고 자살하자 견훤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경순왕은 후백제의 견훤에게보다는 고려의 왕건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935년에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었다. 왕건은 그를 정승공(正承公)으로 봉하였는데 이는 태자보다 높은 지위였다. 또한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그를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으로 삼았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작은아들은 범공(梵空)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에 귀부한 다음에 경순왕은 고려 태조 왕건의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아들였고, 왕건은 경순왕의 백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神成王后 金氏). 그리고 고려 제5대 경종(景宗, 태조의 손자)은 경순왕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憲承皇后). 김부가 경주에서 신라의 왕으로 지낸 기간은 8년이고, 경주를 떠나 개성에서 고려인으로 지낸 기간은 43년이다. ‘경순(敬順)’은 고려에서 내린 시호이다. 경순왕의 무덤은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 있다.
김부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의 유적, 사당, 전설 등이 전승되었거나 전승되고 있는 지역들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 원주시, 인제군, 평창군
경기도 : 연천군, 파주시, 시흥시, 안산시. 수원시
충청북도 : 제천시, 충주시
충청남도 : 보령시
전라북도 : 전주시
전라남도 : 순천시
경상북도 : 영주시, 문경시, 경주시
경상남도 : 하동군
좀더 치밀하게 조사하면 더 많은 자료들을 찾아낼 수 있을 듯하다. 이 논문에서는 강원도 이외 지역의 전설들을 유사한 유형끼리 묶어서 살펴보고 나서 강원도의 김부대왕전설을 살펴보기로 한다.
2. 미륵불 조성자로서의 김부대왕과 그의 자녀
다음 여러 장소에서 김부대왕은 유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1) 경상북도 경주시 형산 왕룡사원(형산사, 옥련사, 왕룡사)
(2) 경상북도 문경시 봉암사(양산사)
(3)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월악산 미륵사(신륵사)지 미륵불
(4) 충청북도 제천시 한수면 월악산 덕주사지 마애불, 김부대왕사
(5)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용화산) 고자암(태고사), 마애미륵불
경주와 포항의 접경지역에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 두 산을 일러 형제산이라고 한다. 이 두 산 사이를 흘러 영일만으로 나가는 강이 있으니 이것이 형산강이다. 형산 위에 사우(祠宇)가 있는데 그 이름은 형산사, 옥련사, 왕룡사, 왕룡사원 등으로 바뀌어 왔다. 왕룡사원에서는 김부대왕과 김충태자의 목상(木像)을 세워 놓고 제사를 지낸다. 그런데 이곳의 김부대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형산과 제산은 원래는 붙어 있던 산이었다. 형산과 제산이 붙어 있을 때에는 비만 오면 물이 빠지지 않아 안강(安康)벌까지 수해를 입었다. 어느 날 김부대왕이 용으로 변하여 꼬리로 산을 끊어 두 산으로 나누어 놓았다. 그 후로는 물이 바다로 빠져 수해를 입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왕룡사원에 좌정한 김부대왕신의 영험성을 강조하기 위한 신화이다. 왕룡사원의 김부대왕신화는 다양한 각편으로 전승된다. 김충태자가 용으로 변하는 각편도 있다.
이규경(李圭景, 1788- ? )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39)의 <김부대왕변증설(金傅大王辨證說)>에 의하면 문경 양산사에 김부대왕의 화상이 있었다
충청북도 충주시와 제천시에 걸쳐 있는 월악산(月岳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① 신라가 망하자 마의태자는 국권을 회복할 뜻을 품고 병사를 기르고자 한다.
② 마의태자 일행은 경주를 떠나 금강산으로 가던 중 문경군 마성면에 이른다.
③ 마의태자는 꿈을 꾼다. 관음보살이 마의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서천에 이르는 큰 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짓고 석불을 건립하 여라. 또 그곳에서 북두칠성이 마주 보이는 자리에 영봉을 골라 마애불을 조성하여라. 그러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④ 마의태자는 덕주공주에게 꿈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덕주공주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말한다. 남매 가 같은 시간에 같은 꿈을 꾼 것이다.
⑤ 마의태자는 월악산 미륵사(신륵사)에 미륵불을 세우고,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월악산 덕주사(德柱 寺)에 마애불을 조성한다. 미륵불과 마애불은 서로 마주보고 있다.
⑥ 마의태자는 국권 회복의 꿈을 안고 강원도로 향하고, 덕주공주는 덕주사에 남아 있으면서 오빠의 건승을 기원한다.
<김부대왕변증설>(1839)에 의하면 이규경은 월악산 신륵사의 늙은 승려로부터, 월악산 덕주사 뒤에 성이 있는데 이 성은 김부대왕이 피란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이규경은 의심을 품고 여러 책을 찾아보고 나서 그 늙은 승려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적어놓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늙은 승려가 이규경에게 역사적 사실을 이야기해 준 것이 아니라 예부터 전해오는 전설을 이야기해 주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1927)에 의하면 덕주사 뒤에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가 있었다.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미륵산(용화산)의 마애미륵불은 김부대왕이 조성했다는 전설도 있고, 김부대왕의 딸이 조성했다는 전설도 있다.
위의 자료들에서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전설의 배경이 모두 사찰이다. 사찰 중에서도 미륵불이 있는 사찰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륵신앙을 통하여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종교적 염원을 읽어낼 수 있다. 그 염원은 물론 김부대왕과 그의 자녀들의 것이 아니라, 전설을 만들어낸 백성의 것이다. 백성은 김부대왕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설을 만들어내었다. 그들은 김부대왕을, 나라를 잃어버려 현실에서는 불행하지만 미래에는 더 크고 행복한 세계, 즉 후천 미륵세계를 건설하여야 하는 인물로 설정하였다. 백성은 자기들의 꿈을 김부대왕의 처지에 의탁해서 표현한 것이다.
둘째, 전설의 등장인물로는 김부대왕과 그의 자녀가 나타난다. 김부대왕의 부인은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관계가 혈연 중심으로 되어 있고, 수직적이다.
셋째, 경주-문경-충주-제천-원주의 노정(路程)이 나타난다. 이것은 경주에서 북상하는 노정으로 김부대왕이나 마의태자의 실제 행로였을 것이다. 그들의 행로였던 지역의 미륵신앙이 김부대왕을 수용하였고, 이에 따라 전설이 형성되었음을 추리할 수 있다.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의 영수암(永守菴), 경상북도 경주시 불곡사(佛谷寺),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사(松廣寺) 등도 김부대왕을 모신 사찰이다.
3. 서낭신으로서의 김부대왕
경기도 시흥시-안산시-수원시도 지리적으로 연결되는 지역인데 이들 지역에서도 김부대왕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전승 장소는 다음과 같다.
(1)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 서낭당
(2) 경기도 안산시 성곡동 잿머리[城頭] 서낭당
(3) 경기도 수원시 평동 벌말 서낭당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 안산시 성곡동, 수원시 평동에서는 현재까지 도당굿이 전승되고 있는데 이들 세 지역의 도당굿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시흥시 군자동의 서낭당은 원도당이고, 안산시 성곡동의 서낭당은 처가도당이다. 그리고 수원시 평동의 서낭당은 작은집도당이다. 군자동의 서낭신은 김부대왕이고, 성곡동의 서낭신은 김부대왕의 부인인 안씨이며 평동의 서낭신은 김부대왕이다.
시흥시 군자동 구준물마을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도당굿을 하였었는데 현재에는 가을에만 도당굿을 하고 있다. 음력 2월에 군자산 정상에서 서낭신인 김부대왕을 맞이하여 마을로 모시고 내려와서 굿을 하고, 안산과 수원까지 유가(遊街)를 하고, 3월 3일에 다시 군자산 정상의 서낭당으로 모셨었다. 서낭당에는 김부대왕, 부인 안씨, 장모 홍씨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지만 주신(主神)은 김부대왕이다. 음력 10월 3일에는 신곡맞이굿을 하는데 이 굿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원래는 유교식 제의 후에 굿을 하였었는데 현재에는 굿만 한다.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8호 경기도 도당굿의 이수자인 무녀들이 굿을 한다.
군자동 서낭당의 서낭신인 김부대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① 신라의 천년 사직이 다하자 김부대왕은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시,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강원도 원주시 등으로 거처를 옮겨다니다가 경기도 시흥시 군자동으로 왔다.
② 이곳에서 그는 안씨 부인과의 사이에 아들 덕지(德摯)를 낳고 정착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
③ 안씨 부인은 매일 군자봉에 올라가서 죽은 남편을 위하여 치성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느 날 꿈에 김부대왕이 나타나서 부인을 위로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에 안씨 부인도 세상을 떠났다.
④ 어느 날 서희(徐熙)가 송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안씨 부인의 영혼이 서희의 뱃길을 보호해 주었다.
⑤ 그 은공으로 서희는 김부대왕과 안씨 부인을 위하여 군자봉 정상에 서낭당을 지어 주었다.
⑥ 그 후로 이 마을 사람들은 매년 서낭굿을 한다.
⑦ 어느 해 어떤 사람이 서낭굿을 할 음식을 보고, “소 여물이나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사람의 입이 돌아가고, 마을의 소가 모두 죽었다. 군자봉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면 말 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전설은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에 서낭당이 생기게 된 유래와 그 서낭당에 김부대왕이 서낭신으로 좌정하게 된 내력을 설명하고, 김부대왕이 영험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안산시 성곡동 잿머리[城頭] 서낭당은 시흥시 군자동 군자봉 서낭당과 짝이 되는 곳이다. 전자의 주신은 여신이고, 후자의 주신은 남신이다. 전자에서는 김부대왕의 부인을 신으로 섬기고, 후자에서는 김부대왕을 신으로 섬긴다. 말하자면 잿머리 서낭당은 군자봉 서낭당의 처가이다. 그래서 잿머리 서낭당에는 김부대왕의 부인 안씨와 장모 홍씨가 서낭신으로 좌정하고 있다. 주신은 안씨이다.
잿머리와 군자봉의 두 서낭당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제9권 ‘안산군’조 ‘사묘’란에 ‘성황사 : 사당이 둘 있는데 하나는 군 서쪽 21리 되는 곳에 있고, 하나는 군 서쪽 32리 되는 곳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전자가 군자봉 서낭당이고, 후자가 잿머리 서낭당임을 알 수 있다.
잿머리 서낭당에서도 매년 봄과 가을에 도당굿을 하였었는데 현재에는 가을에만 하고 있다. 잿머리 서낭당의 당신화(堂神話)는 다음과 같다.
① 고려 때 서희(徐熙)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어 지금의 경기도 안산시(安山市)에 이르렀다.
② 바다에 풍랑이 심하게 일어나 서희는 뱃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③ 서희는 할 수 없이 바닷가 마을에서 잠을 잤다.
④ 소복한 두 여인이 서희 앞에 나타났다. 서희는 무서움을 참고 두 여인에게 호통을 쳤다.
“그대들은 누구이기에 함부로 내 앞에 나타났는가?”
⑤ 두 여인 중 젊은 여인이 서희에게 말하였다.
“저는 신라 김부대왕의 아내이고, 이 분은 저의 친정어머님이십니다. 저는 김부대왕과 혼례를 올리 고 첫날밤에 소박을 맞았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저희들은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한을 삭힐 수가 없어 저희들의 혼령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서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희들의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⑥ 서희는 꿈에서 깨어났다. 서희는 돌로 당집을 쌓았다. 그리고 화공을 시켜 꿈속에서 본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리게 하여 영정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⑦ 그러고 나니 바다가 잠잠하여져서 서희 일행은 무사히 송나라에 다녀왔다.
⑧ 그 후로 사신들이 송나라에 갈 때나 어부들이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갈 때에는 이 당집에 제사를 지냈다. 이곳이 지금의 안산시 성곡동 잿머리 서낭당이다.
한을 품고 죽은 여인을 신으로 삼았고, 이 여신은 항해의 안전과 어촌의 풍요를 관장하는 신임을 알 수 있다. 서희(徐熙, 942?-998)는 고려 전기의 외교관으로, 직접 송나라로 가서 십 수 년간 단절되었던 외교를 트는 데에 공헌한 인물이다. 여신의 영험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국가 대사를 끌어들였다. 고려시대에는 성황제를 관에서 주관하였음도 고려할 만하다. 이 각편은 여인의 원한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김부대왕을 부정적 인물로 설정하였다. 전후 맥락을 고려하기보다는, 다시 말해서 군자동 당신화에 등장하는 김부대왕과의 성격 일치를 고려하기보다는, 여인의 원한을 부각시키는 것 자체가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다른 각편에서 안씨 부인은 김부대왕이 자기를 안산에 버려두고 개성에 가서 태조(왕건)의 딸과 결혼하였기에 이를 원망하는 여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김부대왕과 결혼하였으나 신라가 망하여 비명에 죽은 것을 원망하는 여인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이건 원한을 품고 죽은 여인을 신으로 섬김으로써 현세의 복락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수원시 평동 동사무소 인근에 있는 벌말 서낭당에는 말을 탄 김부대왕과 부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이곳이 시흥시 군자동 서낭신의 작은집이라면 이 여인은 김부대왕의 첩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서 이 여인이 첩으로 부각되어 있지는 않다. 평동에서는 매년 음력 1월 11일에 도당굿을 한다. 과거에는 마을의 남녀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나 현재에는 부녀자들만 참여한다. 이곳의 도당굿도 무녀들이 주관한다.
평동 서낭당(벌말 서낭당)의 당신화는 채록된 것이 없다. 다만 시흥시 군자동 서낭당에 좌정한 김부대왕신이 유가를 나왔다가 이곳에서 쉬어간 적이 있어서 이곳에 서낭당을 짓고 김부대왕신을 모셨다는 이야기, 한 주민이 집을 짓느라고 당 옆의 서낭나무를 건드리고 크게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 등이 단편적으로 전해올 뿐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주-문경-충주-제천-원주로 이어지는 지역의 김부대왕전설과 시흥-안산-수원으로 이어지는 지역의 김부대왕전설이 선명하게 대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전자가 미륵불이 있는 사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후자는 서낭신이 있는 서낭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륵신앙 문화권과 무속신앙 문화권의 차이라 하겠다.
둘째, 전자의 등장인물이 김부대왕과 그의 자녀들인 데 반하여 후자의 등장인물은 김부대왕과 그의 부인(들)이다. 전자의 인간관계가 수직적이라면 후자는 수평적이다. 이것이 미륵신앙과 무속신앙의 차이인지는 더 검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셋째, 전자가 김부대왕이나 마의태자의 노정과 관련을 가지는 데 반하여 후자는 김부대왕 모친의 고향과 관련을 가진다. 경기도 안산시는 김부대왕 모친의 고향이다.
‘신화는 제의의 구술적 상관물’이라는 명제가 있듯이 당제(堂祭)가 먼저 있고, 그 뒤에 당신화(堂神話)가 형성된다. 당신화는 당제를 지내게 된 내력, 당제의 타당성, 당제의 절차, 당제의 신성성, 당신(서낭신)의 영험성 등을 설명하고 강조하는 이야기이다.
서낭신은 원래는 자연신이었고 후에 인격신으로 바뀌는 것이 통례이다. 그리고 인격신으로 수용되는 인물은 역사적 인물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역사적 인물이 서낭신으로 좌정하는 경우 그 신격은 역사적 인물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을 초월해서 존재한다. 신격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실제의 인격과 그 신격을 신봉하는 사람들의 절실한 소망 사이의 긴장 관계로 조정되면서 자리를 잡는다. 그것이 좌정이다.
김부대왕을 서낭신으로 수용하는 경우 주민들은 김부대왕의 인생 역정을 사학자의 시각으로 추적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김부대왕이 마지막 왕, 나라를 잃은 왕, 그래서 한을 품고 죽은 왕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한다. 한을 품고 죽었기에 김부대왕은 내면으로 응결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이 서낭신에게 기대하는 것은 영험이다. 그 영험을 얻기 위하여 주민들은 김부대왕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인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김부대왕은 개성에서 정착하다가 개성에서 죽었다. 그러나 시흥시 군자동 당신화에서 김부대왕은 군자동에서 정착하다가 군자동에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또 다른 곳의 경우도 이와 같다.
앞에서 우리는 경주시 형산 왕룡사원의 김부대왕전설을 살핀 바 있다. 그런데 이 유형의 전설은 후천미륵세계에 대한 종교적 염원을 담고 있지도 않으며, 다음과 같이 사찰과 분리되어 전승되기도 한다.
① 신라 시대에 신라와 일본 사이에 지금의 울릉도 아래쪽으로 섬 열두 개가 남북으로 늘어서 있었 다. 그런데 왜구가 이 섬들을 기지로 삼아 자주 쳐들어와서 나라가 소란하였다.
② 신라 시대에는 또한 지금의 포항 위쪽으로 산이 막혀 있어서 농사지을 땅이 부족하였다.
③ 김부대왕이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저 섬들을 다 없애버리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 다.
④ 손살맥이에 큰 뱀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그 뱀의 크기에 감탄을 하였다.
⑤ 어느 날 한 할머니가 손자를 업고 그 뱀을 구경하러 갔다.
⑥ 손자는 그것을 보고 뱀이 아니라 용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 큰 뱀은 용이 되어 산과 열두 섬 들을 쳐서 없애버렸다.
⑦ 용은 울릉도마저 치려 하는데 하늘에서 “그것은 나라의 수구맥이이니 치지 말라.” 하는 소리가 들려와서 울릉도는 치지 않았다.
⑧ 지금 울릉도는 그대로 있지만 그 아래쪽으로 바다 속에는 열두 섬의 흔적이 바위로 남아 있다.
⑨ 지금의 유금이들은 그 때 용이 산을 쳐서 만들어진 평야이다. 그 손자의 이름이 유금이였다.
이 전설에서 김부대왕은 수호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죽어서 용이 되어 외국의 침략을 막아내기도 하고, 백성들을 위해 농토를 조성해 주기도 한다. 이 전설의 시대적 배경은 신라시대이고 공간적 배경은 경주와 그 북쪽의 동해안 지역인데, 이 지역은 예로부터 왜구의 침략을 자주 받은 지역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농토가 좁은 지역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어민들과 농민들에게는 왜구의 침략으로부터의 안전과 넓은 농토의 확보가 절실한 문제였다. 이처럼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들은 단합하여야 하였고, 단합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신적 존재가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그 신적인 존재로서 김부대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김부대왕을 확고한 존재로 정립하기 위하여 증거물을 제시하였다. 이 전설은 울릉도와 경주 사이의 바다 밑에 바위로 남아 있는 섬들의 흔적과 경주시 강동면 유금리의 유금이들을 증거물로 삼고 있다.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면 나라를 수호하기 위하여 죽은 후에 용이 된 왕은 경순왕이 아니라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내가 죽은 후에 호국대룡이 되어 불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려고 한다.”는 유언을 남겼고, 신라 조정에서는 이 유언에 따라 그를 경주 감포(甘浦) 앞바다에 있는 대왕암(大王岩)에 장사지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왕이고, 김부대왕은 통일신라를 그대로 고려에 넘겨준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수호신으로서 문무왕 대신 김부대왕을 옹립한 까닭은 무엇인가. 조동일에 의하면 김부대왕이 인구에 회자되는 왕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김부대왕에 대해서 말이 많으니, 왜 말이 많은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김부대왕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그러나 인구에 회자되는 인물이 설화의 주인공으로 선택되는 경우는, 마치 숙종대왕의 경우처럼, 이야기가 특정한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전설의 범위를 벗어나서 민담의 세계로 확장될 때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한편 임재해에 의하면 김부대왕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 왕이기 때문이다. “문무가 통일의 위업을 이루는 과정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의 희생이 따라야 했다. 그러나 김부는 왕좌를 포기하면서까지 백성들의 안위를 염려했다. 지배층은 국토를 확장하는 것이 호국이라 여기지만 민중은 일상적인 삶을 안정되게 보호받는 것이 호국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김부대왕이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한 왕이었다는 판단은 『삼국유사』의 김부대왕조에서 김부대왕이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부분을 근거로 삼은 것이다. 이 기록은 고려인의 시각에 의한 기록이라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 『삼국유사』의 이 부분은 『삼국사기』와 내용은 물론 문장까지 같다. 아마도 고려의 공식적 입장이었던 듯하다.
신라 수호신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김부대왕을 끌어들인 것은 김부대왕이 마지막 왕이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민중은 김부대왕의 정치적 배경과 처신을 소상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다만 김부대왕은 마지막 왕이기 때문에 불행한 왕이고, 한을 품고 죽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필자는 이 전설의 근원은 당신화라고 판단한다.
다음 전설은 위의 전설에 비하여 구성이 단순하고 주제가 단일하다.
① 산이 강을 막고 있어서 경주 일대는 온통 물바다였다.
② 김부대왕은 용이 되어 물길을 트고 육지를 만들고자했다.
③ (김부대왕은) 용님 소리를 들으면 용이 되어서 산을 치겠다고 했다.
④ 김부대왕은 죽어서 용(뱀)이 되어 들에 누워 있었다.
⑤ 어른들은 이를 보고 모두 뱀이라고 하며 무서워했다.
⑥ 할머니 등에 업혀 있던 아이는 용님이라고 했다.
⑦ 김부대왕이 용이 되어 득천했다.
⑧ 득천하면서 강을 막고 있는 산을 쳤다.
⑨ 물이 빠져서 큰 들이 생겼다.
⑩ 용이라고 한 아이의 이름을 따서 유금이들이라고 했다.
이 전설은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는 문제는 다루지 않고, 백성들의 농토 문제만 다루고 있다. 즉 백성들에게 좀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 전설은 김부대왕의 위대한 능력을 좀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앞의 전설에서는 김부대왕이 울릉도를 치려 하다가 하늘의 명령으로 울릉도를 치지 못한다. 김부대왕이 하늘의 지시를 받는다. 그러나 이 전설에는 김부대왕을 지배하는 존재가 없다. 김부대왕이 지고의 존재이다. 다만 어른들은 용을 뱀으로 보는데 반하여 아이만 용의 진면목을 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오히려 김부대왕의 신비성을 강조하는 기법이다. 이 전설은 앞의 전설보다 당신화로서의 요건을 더 많이 갖추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전설은 그 근원은 당신화인데 서낭당과 분리되어 전승되고 있다가 왕룡사원에 수용되었다고 판단된다.
전라북도 전주시의 진산인 성황산 정상에도 김부대왕을 모시는 성황사가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 성황사에는 김부대왕, 김부대왕의 두 부인, 마의태자, 공주의 다섯 신위가 봉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매년 음력 5월 5일에 성황제를 크게 봉행해 왔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승이 끊기었다.
4. 신격 사이의 갈등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전설에서 김부대왕은 미륵불 조성자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서낭신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김부대왕은 조상신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김부대왕은 미륵불 조성자, 서낭신, 조상신의 세 유형으로 나타나는 셈이다.
강원도 평창군, 충청남도 보령시, 경상북도 영주시와 경주시, 경상남도 하동군 등에는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사당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제21권에 의하면 경주부의 동북쪽 4리에 경순왕영당(敬順王影堂)이 있는데 절일(節日)마다 주(州)의 수석(首席) 아전이 삼반(三班)을 거느리고 제사하였다. 현재에는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이 사당의 명칭은 동천묘(東泉廟, 1627), 경순왕전(敬順王殿, 경종 때), 숭혜전(1888) 등으로 바뀌어 왔다. 원래는 김부대왕만 모시던 사당이었으나 1887년부터 미추왕을, 그리고 1888년부터 문무왕을 함께 모시게 되어 현재는 미추왕(제13대), 문무왕(제30대), 경순왕(제56대)의 세 임금을 함께 모시고 있다. 세 임금은 모두 경주 김씨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미추왕은 경주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이 된 인물이고,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이룩한 왕이고, 경순왕은 마지막 왕이다. 보령시 남포면의 경순묘(敬順廟)와 영모전(永慕殿, 1966), 하동군 청암면 중리리의 경천묘(敬天廟, 1904), 영주시 영주동의 숭은전(崇恩殿, 1961)과 자인전(慈仁殿, 1958, 八榮亭), 평창군 진부면 호명리의 숭인전(崇仁殿, 1924) 등도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사당이다.
이들 사당은 모두 평지에 있으며, 사당의 명칭들도 서로 유사하다. 조상신이니 후손들이 제사를 드린다. 이 제의는 후손들이 자긍심과 유대감을 가지고 단합하게 하는 기능을 가진다. 이 제의에는 후손들의 집단 거주 여부, 조상신에 대한 후손들의 인식, 최초 본관에서 분파된 각 종파들 사이의 긴장 관계 등이 변수로 작용한다.
조상신으로서의 김부대왕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김부대왕과 일치할 수밖에 없다. 개국 시조, 개촌 시조, 성씨의 시조 등인 경우 신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으나 김부대왕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보령시 경모전의 김부대왕전설이 있으나 신화적인 모티프만 가지고 있을 뿐이고 서사구조 자체가 신화의 수준으로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김부대왕이나 마의태자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확실하게 이루어진다면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전설에서 김부대왕은 미륵불 조성자, 서낭신, 조상신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신격이 서로 패권을 다투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보령시의 김부대왕전설에서 그 실례를 볼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제20권에 의하면 남포현(藍浦縣) 옥마산(玉馬山) 정상에 김부대왕사(金傅大王祠)가 있었다. 남포현은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이다. 사당이 옥마산 정상에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필경 서낭당이었을 것이다. 전주시 성황산 정상의 성황사나 시흥시 군자봉 정상의 서낭당처럼 이곳의 서낭당도 지금은 산 아래로 내려왔다. 이 서낭당의 전설은 아직 찾지를 못하였다.
다음의 전설에서 김부대왕은 미륵불 조성자로 나타난다.
① 김부대왕은 신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명산대천을 두루 찾아다녔다.
② 어느 날 김부대왕은 옥마(玉馬)를 타고 지금의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帝釋里) 왕대산(王臺山) 왕대 사(王臺寺)로 왔다.
③ 김부대왕은 후천미륵세계를 건설하기 위하여 왕대산 암벽에 용화미륵상을 조성하였다.
④ 이에 앞서 김부대왕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려고 이궁(離宮)을 지었다. 이곳에 이궁이 있었기에 ‘궁 촌(宮村)들’, ‘궁촌동(宮村洞)’, ‘궁촌루교(宮村樓橋)’ 등의 지명이 생겨났다.
그런데 김부대왕의 후손들은 전설 속의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인식한다. 언제부터인가 김부대왕 후손들이 이곳에 경순묘(敬順廟)를 짓고 김부대왕의 소상(塑像)을 만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어떤 사정으로 경순묘의 문중제의는 전승이 끊어지고 사당도 허물어져버리고 말았었다. 이것이 전설 속의 미륵불 조성자와 조상신 사이의 갈등이라면 다음은 조상신과 서낭신 사이의 갈등이다.
남포면 제석리 마을 뒤쪽에 있는 경모전(敬慕殿)은 김부대왕을 모시고 있는 사우이다. 여기에는 대왕기와 위패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① 지금의 보령시 남포면 제석리에 사는 김씨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황룡포를 입은 노인이 김씨에 게 말하였다.
“나는 너의 먼 할아버지니라. 내 영혼은 옥마산(玉馬山) 사당에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 도 사당이 허물어져 감실(龕室)이 흙에 묻혔다. 그뿐인 줄 아느냐? 폭우로 산이 무너져 감실이 바다 로 떠내려 왔으니 어서 건져내거라.”
② 김씨는 꿈에서 깨어 바다로 갔다. 상자가 파도에 밀려오고 있었다.
③ 김씨는 상자를 건져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비단이 있어 펼쳐보니 그것은 ‘호서옥마산김부대왕지 기(湖西玉馬山金傅大王之旗)’라고 씌어 있는 깃발이었다. 그것은 노란 바탕에 푸른색을 두른 깃발이 었다. 그리고 그 깃발에는 위패가 싸여 있었다. 그 위패에는 ‘경순대왕김부신주(敬順大王金傅神主)’ 라고 씌어 있었다.
④ 김씨는 그 위패와 기를 자기집 벽장에 모셔놓고 차례를 올렸다.
⑤ 그 후로 김씨는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살림이 풍족해졌다.
이 전설은 전승이 끊긴 문중제의로서의 김부대왕제를 복원하게 된 유래를 설명하고 있는데, 문중제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하고 있다. 먼 바다에서 신성한 존재가 도래하는 것, 그 신성한 존재를 정성껏 모시는 것 등은 신화적 모티프들이다. 김수로왕신화, 석탈해신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전설은 김부대왕의 후손들이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제의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신화’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제의는 경주 김씨들만 참여하는 문중제의에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함께 참여하는 동제(洞祭)로 확장되었다. 매년 음력 1월 14일 밤에 유교식 동제를 지내고 15일 밤에는 부녀자들이 무당을 불러 굿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보령시 대천동 지역의 경주 김씨들이 1966년에 보령시 남포면 창동리 고야실에 영모전(永慕殿)을 별도로 지어놓고 제석리 경모전에 있는 대왕기와 위패를 가져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제석리 주민들이 반대하여 부득이 족보에 있는 김부대왕 영정을 복사하고 위패를 새로 만들어 봉안하였다.
하동군의 경천묘는 원주시 학수사에 있던 김부대왕 영정이 잘 받들어지지 않자 김부대왕 후손들이 그 영정을 옮겨 모시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김부대왕신의 경우 조상신이 서낭신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고, 서낭신이 조상신으로 바뀌는 경우도 있다. 위에서 살핀 보령시 경모전(敬慕殿)의 김부대왕은 조상신에서 서낭신으로 변모한 사례이고, 앞으로 살필 강원도 인제군 대왕각(大王閣)의 김부대왕(마의태자)은 서낭신에서 조상신으로 변모한 사례이다. 이러한 변모는 혈연과 지연의 세력 판도에 따라 일어난다.
5. 강원도의 김부대왕전설
강원도에는 김부대왕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사당도 있고, 김부대왕이 미륵불 조성자로 등장하는 전설도 있고, 김부대왕을 서낭신으로 모셨던 서낭당도 있다.
평창군 진부면 호명리에 숭인전(崇仁殿)이 있다. 1924년에 신축하고 6‧25한국전쟁(1950) 이후에 중수한 사당이다. 김부대왕의 영정을 봉안해 놓고 매년 음력 9월 9일에 김부대왕의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곳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설, 즉 김부대왕이 조상신으로 등장하는 전설은 없다.
원주시 귀래면에는 김부대왕의 영정을 봉안한 절이 있었다. 이규경(李圭景, 1788- ? )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1839)의 <김부대왕변증설(金傅大王辨證說)>에 의하면 원주의 용화산 학수암(鶴樹菴), 황산사(黃山寺), 고자암(高自菴, 일명 太古寺)은 김부대왕과 관련이 있고 이 내용은 지금까지 구전되어 오고 있다.
(가) 경순왕이 여기를 와 가지고, 한 삼십칠팔 년 간, 학수사라는 절을 지어 가지고 거기 계셨단 말이야. 학수사. 그래 거기 계시면서 뭐야 대한민국의 방방곡곡을 다니셨거든. 그러다 나중에 돌아가실 적에는 인제 개성, 송도라 그러지? 거기 가셔가지고 돌아가셔서 원 시체를 경주에다 모시기로 했는데 지금 현재 그 연천 지방인데 거기가 고랑포라고 옛날에 파주 지방이었는데 현재는 연천 지방으로 바뀌어가지고 지금 고랑포라는 데 거기 모시고 있단 말이야.
(나) 미륵산이라는 유래는 옛날에는 용화산이었대. 용화산인데, 우리 세보에 보면, 경순왕께서 그 미륵을 조성했다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뭐 본인이 하지는 않고 누굴 시켜서 아마 했으리라 이렇게 생각을 한다고. 그래 인제 미륵산이라는 명칭을 나중에 붙였지. 미륵을 조성해 놓구서. 경순왕이 여기 계실 때 그 때 만든 거지. 그래 귀래라는 게 귀한 손님이 오셔서 그렇다는 건 경순왕이 와서 그렇게 붙였다는 거.
(다) 그래 여기가 귀래면 주포1린데, 마을 이름이 황산인데, “경순왕께서 이 산에 와 계셨다.”구 그래서 옛날에는 임금 황(皇)자 뫼 산(山)자를 썼을 거다 이거야. 그런데 이조 때 와 가지고서는 누르 황(黃)자를 쓴 거야. 그래 여기 지명이 황산인데, 그 내력이 그렇게 돼서 황산이라고 부르게 된 거지.
(라) 영정도 여기 이백오십 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 모시고 있었어. 그러다가 하동 그 쪽으로 가지고 가버렸어. 여기서 안 모시고 그러니까. 지금도 하동에서는 영정을 모시고 있다고. 강원도 진부에도 있고 경상도 영주, 여수 송광사에도 있고. 또 경주에 숭혜전이 있고. 그래 금년에 여기도 원래 있던 자리였기 때문에 문화재나 종친회에서 재건, 복원 사업을 하고 있는데, 아마 내년에 건립이 될 거야. 영정 모시던 사당터가 있어.
위의 전설들에서 김부대왕은 미륵불 조성자로 나타난다. 이 전설들은 김부대왕이 원주에 거주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애미륵불, 지명 등을 증거로 제시한다. 서사구조를 갖춘 전설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김부대왕을 서낭신으로 모신 서낭당은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 있다. <김부대왕변증설>(1839)에 의하면 김부대왕은 인제현 김부대왕동(지금의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서 살았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1927)에도 이와 같은 언급이 있다. 1940년에 발간한 『강원도지』에도 김부대왕이 옛날에 인제군 남면 김부리에 머물러 있었다고 한다는 언급이 있다. 김부대왕의 무덤이 상남면 상남리 오미자골 입구 도로변에 있다는 조사도 있다. 김부리에 종합전술훈련장이 들어서게 되어, 김부리의 마을들은 1997년에 완전히 해체되었지만 김부대왕을 모신 신당으로 인식되어 온 대왕각(大王閣)은 현재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 김부리의 대왕각은 김부대왕을 모신 사당이 아니라 마의태자를 모신 사당이라는 학설이 대두됨에 따라, 마의태자를 중시조로 모시는 부안 김씨와 통천 김씨 종친회에서는 1983년부터 대왕각에 와서 별도로 문중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고(매년 음력 9월 9일), 1987년에는 부안 김씨 단독으로 인제군 남면 신풍리, 곧 김부리로 들어가는 길목에 마의태자유적지비(麻衣太子遺跡址碑)를 세웠다.
김부1리는 본동(1반), 항병골(2반), 비둑재(3반), 단지골(4반)의 네 개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신제와 서낭제는 반별로 따로 지내고, 김부대왕제는 네 마을의 주민들이 합동으로 지냈다. 제일은 음력 5월 5일과 9월 9일이었다. 대왕각의 위치는 본동이다. 김부리의 김부대왕과 관련해서는 옥새바위, 수구네미, 옥터골, 항병골, 맹개골, 군량리(양구군) 등에 관한 전설들이 있다. 이들 중에서 옥새바위전설이 비교적 전설로서의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고, 나머지는 단순한 지명유래담이다.
(가) 옥새바우 [바위] 하단지골 북쪽 산 밑에 있는 바위.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김부대왕의 옥새를 감췄던 곳이라 하며, 여러 빛깔의 뱀이 가끔 나와 돌아다니는데, 옥새를 지키는 것이라 함.
(나) 옥새바우라는 것은 김부대왕이 이 김부리에 들어와 있을 때 거기다 옥새를 감춰두었다, 그래서
옥새바우지. 거기에 오색 뱀이 있다 해서 애들은 그 근처에 못 가게 했어. 우리도 학교 다닐 때 그 하얀 뱀을 봤어. 바우가 인제 이렇게 있으면 그 위에 이렇게 턱 덮였거든. 이렇게 들여다보면 뱀이 보여. [청중 : 그게 백사지, 백사.] 옥새를 지키는 거여.
(다) 옥새바우는 이게 틈이 나 있어요, 뱅 돌아가면서. 거기매 그전에 뱀이, 뱀이 전부 아주 수태 나와 대가리를 내밀고 있어요. 김부대왕이 거기다 이제 옥사를, 옥사를 거기다 넣었다고 그래 이제 옥사바우라고, 이제 뱀을 옥사뱀이라고 그랬어요. 게 뭐 옛날에 뭐 일본 놈이 옥살 꺼낼려고 뭐 그걸 떠 일쿨라고 하다가 죽었다고. 즉사해 죽었다고.
(라) 옛날에 일본 순사가 김부리만 왔다가 가면 파면됐는지, 마의태자가 왔는데 왕자가 신이 있어서 파면시킨 모양이야. 옛날에 그러드라구, 노인네들이.
김부대왕이 옥새를 바위에 감추었다는 모티프는 다른 지역의 김부대왕전설에는 없고, 인제 지역의 전설에만 있는 독특한 모티프이다. 김부대왕은 나라를 내어준 왕이 아니라, 국권 회복의 의지를 가진 왕이라는 것이다. (다)에서는 그러한 국권 회복의 의지를 일제 시대의 식민지 상황과 결부시키고 있다. 김부대왕신이 특히 일제 시대에 크게 부각되었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 (라)에서는 김부대왕이 마의태자로 바뀌어서 나타난다. 국권 회복의 의지를 가진 주체로서는 김부대왕보다 마의태자가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대왕각의 신격이 김부대왕에서 마의태자로 바뀌면서 혼란이 일어났다.
리태두는 김부리 인근 지역의 지명, 갑둔리 5층 석탑의 명문(銘文), 이두문자의 원리, 대왕각 위패의 문구 등을 논거로 삼아 김부리(金富里)의 김부(金富)는 김부대왕(金傅大王)의 김부(金傅)가 아니라 마의태자라는 것, 마의태자는 김부리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지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는 것 등을 밝혀내었다. 여기에 더하여 김종권, 박성수 등은 마의태자는 지금의 중국 땅으로 가서 금(金)나라를 세우고 첫 임금이 되었음을 밝혀내었다.
신종원은 ‘대왕’이라는 용어의 사용 관례, 대왕각 위패 문구의 해석 방법, 갑둔리 5층 석탑 문구의 해석 방법, 지명 유래를 분석하는 관점 등을 논거로 하여 대왕각은 마의태자를 모신 사당이 아니라 전형적인 민속 신당임을 밝혀내었다.
윤형준은 우리나라 동제에서 역사적 인물이 수용되는 양상을 살피고 나서 김부대왕은 민중의 시대적 욕구와 역사 인식을 바탕으로 형상화되었다는 것,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펴지 못하고 좌절당한 요인에서 신격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박신정은 김부리의 산신제, 서낭제, 김부대왕제를 각 마을별로 살피고 나서 마을의 유대와 결속이 약화되었던 시기에 김부대왕신의 신격을 재해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전승 형태도 변모되었음을 밝혀내었다.
이제 이러한 선행 연구들을 종합하고 재검토하여 수용함으로써 온전한 해석을 내려야 할 것이다.
김부대왕이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에 거주하였다는 19세기 전반기의 기록(이규경, <김부대와변증설>, 1839)은, 다른 지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김부대왕이 김부리의 서낭신으로 좌정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겠다. 19세기 이전 어느 때에, 마을의 주민 구성의 변동, 생업의 변동, 마을의 권력 구조의 변동 등으로 새로운 제의가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자연신을 인격신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김부대왕신을 선택한 동기에 대해서는 지명과의 발음의 유사성, 당시 민간신앙의 추세, 당시 주민 구성의 양상 등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나 이 부분은 앞으로 더 탐구해야 할 문제이다.
신을 교체하고 나서는 당신화를 만들어내는 것이 수순이다. 그것은 구비문학의 특성상 신의 교체 시기보다 훨씬 이후일 것이다. 일제 시대가 되면서 주민들은 김부대왕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나라를 잃은 왕이기 때문이다. 김부대왕신의 성격도 주민들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차츰 변모하여 왔을 것이다. 옥새바위전설 자체, 이 옥새바위에 일본인이 결부되는 전설 등에서 우리들은 그러한 변모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런데 김부리의 김부대왕전설은 서낭당의 서낭신에 대하여 역사적 관점으로 접근하기 시작하면서 퇴색한다. ‘대왕당’이라는 명칭이 ‘대왕각’으로 바뀌고, 신격이 김부대왕에서 마의태자로 바뀌고, 주민 중심의 서낭제에 후손 중심의 문중제가 결합되다가, 김부리가 군대의 종합전술훈련장으로 매각되어 마을 자체가 해체되었다.
마의태자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와 전설을 정확히 구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금강산, 소금강, 설악산 및 김부리에서 각각 전승되고 있는 마의태자전설은 대궐터, 산성, 군사훈련, 전투 등의 모티프를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같은 유형의 전설이다. 전설에서 마의태자는 충신들과 군사들을 이끌고 산 속에 들어가 대궐을 짓고 산성을 쌓는다. 감옥과 사형대를 만들어놓고 군사들을 엄격하게 훈련시키며 많은 양식을 비축해 놓는다. 그리고 고려와 정면 대결한다. 전설은 자연인으로서의 마의태자가 실제로 어떠한 인물이었는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나라를 잃어버린 왕자로서의 마의태자라면 마땅히 어떻게 행동하여야 하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6. 맺음말
김부대왕(金傅大王)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그는 고려와 싸우자는 아들(마의태자)의 주장을 물리치고, 신라를 그대로 고려에 넘겨주었다. 그가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신라의 왕으로 지낸 기간은 8년이고, 고려 태조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서 지낸 기간은 43년이다. 김부대왕은 그 기간을 어떻게 지냈는지, 당시 백성들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특히 신라의 유민은 그를 어떻게 평가하였는지 등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는 문헌 자료는 없다.
다만 구전 자료가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구전 자료는 본질적으로 대상에 대한 객관적 진술이 아니라, 언술 주체의 주관적 기대의 표출이다. 김부대왕이 개성에서 죽는다. 영구 행렬이 경주로 향한다. 남하할수록 영구를 따르는 신라 유민들이 불어난다. 반란을 두려워하여 영구 행렬을 멈추고 장지를 정한다. 그래서 김부대왕의 무덤이 개성 바로 남쪽인 연천에 있다. 이러한 것이 구전 자료이다. 이것은 신라의 영역이었던 대구에서 1991년에 채록한 전설이다. 김부대왕의 무덤이 연천에 있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내력을 설명하는 이야기는 전설을 만들어낸 집단의 주관적 기대의 표출이다.
김부대왕전설을 통하여 우리는 불행한 현실을 극복하고 행복한 미래를 맞으려는 인간의 꿈과 현실에서 복락을 누리려는 인간의 욕망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었다. 전자는 경주-문경-충주-제천-원주로 이어지는 미륵신앙 문화권에 잘 나타나 있고, 후자는 시흥-안산-수원으로 이어지는 무속신앙 문화권에 잘 나타나 있다. 김부대왕전설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혈연(血緣) 집단과 지연(地緣) 집단 사이의 갈등이 부단히 부침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사당에서의 문중 제의와 서낭당에서의 동제가 이합집산하는 양상에서 잘 나타난다. 미래의 행복과 현재의 행복 사이의 갈등, 그리고 혈연 집단과 지연 집단 사이의 갈등은 우리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삶의 본질적인 문제이고, 삶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신앙과 결부되어 있으며, 김부대왕전설은 신앙과 결부된 제의에서 파생된 설화라는 사실을 유념할 만하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문제의 발견에 그친 것을 필자는 아쉽게 생각한다. ‘발견’의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탐구’의 단계에 이르려면 다음의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거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김부대왕 관련 자료의 현지 조사가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 미륵신앙과 무속신앙의 사회적, 문화적 실체가 드러날 것이다. 김부대왕신앙은 고려 시대와 일제 시대에 특히 융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시대의 김부대왕신앙이 좀더 면밀하게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1839)에 일본인이 순천 송광사에 있던 김부대왕 영정을 일본으로 가져갔다가 다시 가져왔다는 기록의 내력, 동해안 별신굿의 거리굿 무가에 “세번째 치국은 경상도 경주 김부대왕 치국이요,”라는 구절이 삽입된 내력 등도 소상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면 김부대왕신앙과 거기에서 파생된 김부대왕전설의 실체가 좀더 선명하게 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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