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시·관람

[국립경주박물관] 보물635호 황금보검

박근닷컴 2012. 12. 27. 22:28

 

 

 

로마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보물 제635호 황금 장식 보검.

이밖에 금령총 출토 청색 반점무늬 유리잔은 옛 로마식민지인 독일 쾰른 지방이 원산지이고

 황남대총 남분에서 나온 봉황머리 모양 손잡이 병은 서방유리의 전형을 보여준다.
[문화재청 자료]

1500여 년 전 죽은 신라인의 이름 모를 무덤에서 1973년 출토된 유물 황금보검이다.

발굴된 후 5년여의 과학적인 보존처리 과정을 거쳐 이제 그 완전한 모습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게 된 것이다.

이 검은 알려진 대로 1973년 계림로 공사도중 발굴된 것이다.

경주고분발굴조사단이 지금의 천마총인 155호 고분의 발굴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이 155호분 발굴에 세간의 시선이 쏠리고 있을 동안 시내에서 첨성대에 이르는

남북간 새로운 계림로가 계획되어 아무런 사전 발굴조사 없이 업체에 맡겨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 신라시대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공사는 중단되고 긴급수습발굴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처음 단순한 조사로 생각한 것이 신라공동묘지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게 되어 발굴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당국은 서울과 대구의 참가 가능한 대학박물관을 조사에 긴급 투입하게 되었고 아울러 국립경주박물관도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황금보검이 출토된 무덤은 이때 경주박물관에서 발굴한 무덤으로, 14호 무덤으로 번호를 붙였다.

계림로 공사에 필요한 장비동원한 건설업체는 공사가 중단되자 수습발굴조사는 기껏 2,3일이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동원된 장비는 그대로 현장에 남겨두고 발굴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조사가 완료되기까지는 2,3개월도 더 소요되었다.

결국 건설업체는 도로 공사는 고사하고 남겨둔 건설장비 사용료도 낼 길이 없어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는 소식이

발굴도중 전해지기도 했다. 공사도중 문화재발굴로 업체가 문을 닫은 최초의 일로 기록될 것이다.

이 보검이 어떻게 신라 수도 경주, 그것도 외형이 큰 봉토무덤이 아닌 공동묘지 성격의 조그마한 무덤에서 출토된 것인지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흑해연안 지역에서 이러한 형태의 검이 발견된 예가 있어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어느 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연구자들은 생각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X선 조사결과 검 집안에 짧은 칠검이 있다는 것과 무덤의 주인공이 비단옷을 입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러한 사실로 무덤의 주인이 당시 귀족이었음은 알게 되었지만 문제는 두 사람의 남성이 나란히 한 무덤에 묻혔음이 밝혀져 쌍둥인지, 형제가 동시에 죽어 묻혔는지 새로운 수수께끼로 남았다.

상상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고고학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발굴조사도 중요하지만 이를 해석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과제임을 알게 한다.

결과적으로 고고학의 한계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 황금보검은 6세기 유물로 보물 제635호로 지정되어 국립경주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계림로 14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이 무덤은 길이 3.5m에 너비 1.2m로 대릉원 일대에 있는 고분으로는 크기가 작았지만

왕릉에 버금갈 만큼 화려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봉분이 흔적도 없이 깎여나간 위에 민가가 지어져 있었기에 오랜 세월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무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출토품은 피장자의 허리춤에서 나온 황금 장식 보검.

길이가 36㎝에 이르는 이 보검은 황금으로 장식하고 군데군데 홍마노를 깎아 넣어서 격조 높은 색조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당시 보검의 출현에 학계는 긴장했다. 너무나도 이국적인 정취를 풍겼기 때문이다.

보검을 자세히 보면 테두리와 내부가 수많은 금 알갱이로 장식되어 있는데, 바로 그리스 로마 양식인 누금 기법이라고 한다.

 

이후 이 보검이 외래 문물의 영향을 받아 신라에서 제작된 것인지, 수입품인지 논란이 없지 않았지만

요즘은 외국에서 유입된 것이라는 시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2001년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신라황금’특별전에 출품되었을 때도 ‘외래품(Import!ed Goods)’ 코너에 진열되었었다.

신라는 서역과 문물교류가 매우 활발했던 만큼 계림로 14호분 자체가 외국인의 무덤이 아니었겠느냐는 추측도 없지 않다.

 

이런 모양의 보검은 해외에도 유례가 드문데, 카자흐스탄의 보로로에 지역에서 출토된 칼과 중국의 신장(新疆)위구르자치주에 있는 키질 제69굴의 벽화에 그려진 무사의 칼이 가장 비슷하다.

모두 실크로드의 중간기착지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 지역이다.

 

한 걸음 나아가, 이 보검의 제작지를 로마 세계와 직접 연결시킨 사람은 일본학자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이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출간된 뒤 2002년 국내에서도 번역된 ‘로마 문화 왕국, 신라’에서 일찍부터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다뉴브강 남부 트라키아 지방의 켈트족이 이 보검을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요시미즈는 켈트 지배자의 사신이 직접 신라로 가져왔거나 신라의 사절이 그곳에서 하사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설명한다. 실크로드 상인이 신라의 고위층에게 판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이 정도의 최상급 의례용 보검이라면 상거래 대상은 아니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트라키아는 375년부터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 즉 흉노의 근거지이다.

유럽을 100년 동안이나 공포로 몰아넣은 아틸라의 본거지이고

게다가 장식 보검은 아틸라가 유럽을 제패한 시기, 로마와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스타일이라고 한다.

‘신라·서역교류사’를 쓴 정수일 교수는 4∼6세기 신라와 로마 사이에 이렇듯 상상을 초월한 만남이 있었던 것은

흉노 등 실크로드로 서역과 교류하던 유목민족 국가가 통로 역할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설명한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로마 세계에서 만들어졌지만 신라의 수도 경주에 묻힌 황금 장식 보검이라는 것이다.

 

[일부 인터넷자료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