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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 초지진 요새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구축한 요새로 인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위치하고 있다.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로즈의 극동함대와 고종 8년(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여 내침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고종 12년(1875) 8월 침공한 일본군함 운양호를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격전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미국 및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근대식 무기를 가진데 비해 조선군은 사거리도 짧고 정조준도 잘 안되는 열세한 무기로 대항해 싸웠다. 당시 이 초지진에는 병마첨절제사 1인, 군관 11인, 군사 320인, 전선 3척이 주둔하였었다. /김범준기자 |
인천 앞바다에 정박해 있던 미군 함대를 떠난 함정들이 강화도 손돌목 해역으로 들이닥쳤다. 광성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즉각 대포를 쐈다. 인근 덕포진 포대에서도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저항에 부닥친 미 함선은 탄환이 날아오는 곳을 향해 대포로 응사하면서 퇴각했다. 빗발치듯 한 적의 탄환에 덕포진의 포군 1명이 맞아 전사했다. 고종 8년(1871년) 음력 4월 14일, 강화도 앞바다에서 조선이 미군과 벌인 사상 첫 교전이었다. '강화도 손돌목 전투', 신미양요는 그렇게 시작됐다.
■강화도, 맥없이 무너지다
미 함대는 아흐레 뒤인 4월 23일 대대적인 공격에 나선다. 군함과 최정예 해병대를 동원해 초지진 상륙작전을 편 것이다. 청나라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인 로우와 해군 제독 로저스가 이끄는 미 함대는 앞서 부평부사 이기조와의 접촉에서 손돌목 전투 피격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조선 정부가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보복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이 '경고'가 조정에 닿기도 전에 작전에 돌입했다.
4월 24일 조정에 급보가 들어왔다. 서양 오랑캐가 23일 강화도 초지진에 침입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은 손돌목 전투에서 미 함대가 퇴각한 사실에 한껏 고무돼 있었다. 미 함대가 겁을 먹고 도망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날 고종은 초지진이 기습 공격을 받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출정한 군사와 각 고을 포병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며 양식을 넉넉히 내어주도록 하고, 군수 물자를 바친 이들의 뜻을 가상히 여겨 포상을 지시하고 있었다.
조정은 급보를 접한 뒤 강화도에 병력을 급파하기로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곧이어 광성진이 함락됐다는 비보가 조정에 전달됐다. 미 함대는 초지진에 이어 덕진진을 기습 점령한 뒤 광성진을 공격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광성진에서는 한바탕 혼전이 벌어졌다. 육지에 상륙한 미군 병사들이 대포와 소총을 일제히 쏘아대자 이에 대응해 광성진에서 소총 사격을 개시한 것이다. 덕진진에 정박하고 있던 미 함선도 광성진을 향해 함포사격을 가했다. 곳곳에서는 육탄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돌멩이와 진흙을 집어던지고, 이 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맨주먹으로 대항했다. 어재연 장군은 포 탄환을 손에 쥐고 싸우기까지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칼로 자결하거나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조선왕조실록 고종 8년 4월 24일자 기사는 당시 전투 상황을 이 같이 묘사한다.
'묘시(卯時, 오전 5~7시 사이)에 서양 오랑캐 400~500명이 광성진에 침입했다. 이양선에서 쏘아대는 대포알은 비 오듯 날아왔고, 육지의 적들이 쏘는 조총알은 우박 쏟아지듯 마구 떨어졌다. 좌우로 적들이 달려들어 선두에 선 우리 군사들이 곧 패했고, 뒤따라 온 부대도 패하고 말았다…'. 광성진을 손아귀에 넣은 미군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한 뒤 정박지인 작약도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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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의 강화도 상륙장면과 광성보 전투 후 전사한 조선 장병들의 참혹한 모습 /출처='서양인이 만든 근대 전기 한국 이미지Ⅲ-침탈 그리고 전쟁'(청년사) |
■잿더미로 변한 강화도
조선과 미 함대의 교전 기간은 사흘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군의 피해는 심각했다. 미 함대가 5월 16일 자진 철수한 뒤 조정에서 확인한 아군 전사자는 53명, 부상자는 24명이었다. 어재연 장군은 피를 흘린 채 참호 속에 묻혀 있었다. '다른 여러 시체들은 썩어 누가 누군지 구분할 수가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미군 측의 기록을 보면 아군은 무려 243명이나 사망한 것으로 집계돼 있다. 이에 반해 미군은 3명이 전사하고, 9명이 부상하는데 그쳤다. 한마디로 조선의 참패였던 것이다. 미 함대의 무차별적인 함포사격에 목숨을 잃은 민간인들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란을 겪은 강화도 백성들의 삶은 참담했다. 미군의 방화로 초지진과 광성진의 수많은 민가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고종은 집이 불타 거리를 헤매는 백성들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다며 급기야 내탕고에서 1천냥을 내어 민심을 수습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다.
■예견된 패배
조선의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200년 가까이 전쟁이 없었던 때문인지, 유약한 임금 탓인지, 당시 조선의 국방력은 극도로 약화돼 있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6년 4월 흥선대원군 부친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돌아간 뒤 '금단의 나라 조선'이란 제목의 책을 낸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조선의 병력과 무기, 방어 진지 등을 비교적 상세히 기록해 놨다. 조선 병사들의 무기는 구식이었다. 낡은 화승총과 활, 삼지창이 고작이었다. 주요 하천과 강둑을 따라 설치한 많은 요새와 포대의 무장은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총통은 병기창에서 녹슬어가고 있었고, 강화도에서는 몇 세기 전에 매장됐을 것으로 보이는 오래된 총포들이 나왔다.
조정에서도 취약한 군사력과 소홀한 방어태세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한 직후인 1866년 7월 좌의정 김병학은 고종에게 "군사 방비가 해이하고 해안 방어가 허술한 것이 요즘과 같은 때가 없었다"고 개탄했다. 그는 "군사 수가 모자라거나 빈 자리에는 일일이 다 보충해 놓도록 하고, 무기들이 녹슬었거나 무딘 것들은 있는 대로 다 수선하도록 하며, 때때로 군사 훈련을 하여 늘 적과 맞설 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역설했다. 셔먼호 사건의 일등 공신인 박규수는 돌로 쌓아올린 성이 대포에는 취약하다는 점을 알고 곳곳에 토성을 건설해야 한다는 장계를 올리기도 했다. 박규수는 자신의 '위수지역'에 직접 토성을 쌓는 '실험'을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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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섬들의 '요새화' 추진
미 함대가 완전히 물러간 뒤 조정은 해안 방어의 요충지인 강화도와 인천의 중요성에 대해 의논한다. 영의정이 된 김병학은 이때 "강화도는 경성의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면서 "군사장비에서 가장 긴요한 것은 화약무기이니, 지금 서둘러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 "인천은 바닷가에서 가장 긴요한 지역으로 엄히 경계해야 한다"며 인근 영종도, 팔미도, 월미도, 대부도 등에 방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이에 고종은 강화도에 군사를 증원하고 보루를 튼튼히 해 훗날 다시는 서쪽을 염려하는 근심이 없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신미양요의 발단, '제너럴 셔먼호 사건'
신미양요의 발단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었다. 미국 상선인 셔먼호는 1866년 7월 대동강에 침입해 교역을 요구하며 대포를 쏘아대는 등 무력시위를 벌이다 조선의 화공작전으로 격침됐다는 게 일반적 평가다. 이때 토마스 목사 등 승선자들은 평양 군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미국은 이후 셔먼호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를 위해 조선에 몇 차례 함대를 보내기도 했다. 신미양요를 일으킨 로우 공사와 로저스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 해협에 나타나 명분으로 내세웠던 것도 셔먼호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었다. 근대 한미 관계사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김원모 단국대 명예교수는 "셔먼호 사건은 명분에 불과했고, 조선에 온 진짜 목적은 개국과 통상이었다"며 "미국은 1854년 일본을 굴복시킨 것처럼 조선에도 강력한 무기로 군사적 위협을 가하면 순순히 문호를 개방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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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한미관계 전문가 김명호 교수가 본 신미양요
제국주의 국제정세 안이한 대응… 美 '셔먼호' 구실 무력 개항 시도…
장기체류 부담에 자진철수한 것…
"조선 정부는 앞으로 어떠한 위기가 닥칠지 모른 채 사태를 너무 낙관했습니다."
김명호 서울대 교수는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도 보듯 조선은 이양선이 침입해 무력시위를 하며 통상을 요구하는 데도 대우를 해주고 납득을 시키면 스스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며 이 같이 말했다.
김 교수는 "조선은 당시 제국주의 국제 정세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며 "나라 밖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 밝았을 박규수 조차도 미국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대화를 통해 분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병인양요가 발발하고, 신미양요의 시발점이라고 할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발생했던 1866년에 평안감사로 부임한 박규수의 당시 활동을 중심으로 초기 한미관계에 대해 집중 연구한 이 분야 '권위자'로 꼽힌다.
기존 학계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척화'와 '쇄국'을 주장한 반면, 박규수는 이에 맞서 '개화'와 '통상'을 부르짖은 인물로 평가해 왔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박규수는 대동강에 침입한 셔먼호를 격침시키는 등 조선을 넘보는 서양 오랑캐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던 대원군과 뜻을 같이 했다"며 "박규수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외교 문제를 풀려고 노력했던 것은 맞지만 그 당시 박규수를 개화파로 보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무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미국은 셔먼호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조선에 함대를 잇따라 파견했다. 김 교수는 "앞서 미국은 일본 도쿄만으로 함대를 보내 무력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경험이 있다"면서 "결국은 셔먼호 사건을 구실 삼아 일본처럼 영국 등 다른 서구 열강에 앞서 조선을 먼저 개항시키려 했던 것이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미국은 끝내 조선 정벌에 실패하고 만다. 김 교수는 "조선은 일본과 사정이 달랐다"며 "미 함대가 사정거리 안에서 도성을 향해 포를 쏘려면 한강을 따라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강화도는 적의 위협을 차단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던 것이다.
김 교수는 "손돌목 등 강화도 앞 바다는 암초가 많고 해로도 험악하다"며 "미 함대가 한강으로 진입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미 함대가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지만 신미양요는 결코 조선의 승리가 아니었다. 김 교수는 "미 함대는 석탄 연료가 부족했고 식량과 식수난을 겪는 등 장기 체류의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철수한 것이다"며 "조선은 참패를 당하고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승리에 도취돼 있었다"고 꼬집었다.
/임승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