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박물관, "전형적인 통일신라 가람배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제31대 신문왕 3년(683)에 재상 충원공(忠元公)이 건의해 세우게 되었다는 영축사(靈鷲寺. 영취사라고도 한다)는 그 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동서로 포진한 쌍탑을 중심으로 그 중심 북쪽편에 금당을 배치한 이른바 쌍탑일금당식(雙塔一金堂)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가람 구조를 한 사찰로 드러났다.
울산박물관(관장 김우림)은 영축사의 범위와 규모, 가람 배치 등을 확인하고 현장에 무너진 채 방치된 석탑을 복원 정비하기 위한 기초 자료 확보를 위해 지난 10월15일 이래 학술발굴조사를 벌인 결과 동탑에서 서쪽으로 43m 떨어진 지점에서 서탑 기단부 시설을 확인하고, 두 탑의 중심축에서 북쪽으로 10m 떨어진 곳에는 금당 흔적을 찾아냈다고 13일 말했다.
박물관은 이번 조사 결과 "동서 양탑은 탑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대석인 탑구(塔區)가 확인된다"면서 "이는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천군리 삼층석탑의 양상과 유사하다"고 말했다.
석탑은 돌을 다듬는 방법이나 그것을 쌓거나 연결하는 방식 등을 볼 때 신라 지방사찰 중에서도 사격(寺格)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고 박물관은 덧붙였다.
금당 터는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평면 방형(16.4×16.4m)으로 드러났다.
나아가 금당 터 남쪽, 쌍탑 중앙에서는 석등 1기를 발견했으며, 금당 남쪽 15m 정도 떨어진 곳에서는 정면 3칸, 측면 1칸인 중문(中門) 터로 추정되는 총길이 12.5m, 폭 3.8m인 적심(積心)시설을 확인했다. 적심이란 건물 붕괴를 막기 위해 초석 밑에 자갈 등으로 까는 바닥다짐 시설을 말한다.
이 외에도 금당지 남쪽으로는 석등 1기가 확인되고, 15m 정도 떨어져 정면 3칸, 측면 1칸의 중문지(中門址)로 추정되는 총 길이 12.5m, 폭 3.8m의 적심시설을 확인했다.
중문 터 적심시설 내부 구역 중에서도 서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는 통일신라시대 귀부(龜趺. 거북 모양 비석받침돌)가 동쪽으로 머리를 둔 채 위치한다. 이런 귀부는 모양으로 볼 때 경주 성덕왕릉 귀부와 아주 유사하다고 조사단은 지적했다.
중문지 북쪽에서는 모종의 의식을 담아 일부러 묻은 토기인 이른바 진단구(眞檀具) 2점이 확인됐다.
이번 조사에서 수습한 출토 유물 중에는 8세기 무렵 전형적인 구양순체 글씨체로 쓴 '物/般若/宗河'(물/반야/종하) 문자 새김 비석편 1점과 통일신라시대 금동불상 2점, 석탑 상륜부 복발 조각과 보륜 조각 1점 등이 있다.
금당지 불상 |
금당 터 본존불 지대석에서 동쪽으로 130㎝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된 금동불은 폭 3.2㎝, 높이 7.3㎝이며, 대체로 4등신 정도의 신체 비례가 나타나고 몸체에 비해 상호가 큰 편이다.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가 크고 높게 표현됐다. 두 귀는 선각으로 크게 표현하고 목은 매우 짧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이며 제작시기는 9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금동불 또 한 점은 동탑 터 중에서도 북측 지대석과 하대면석 사이 공간에서 발견됐다. 폭 2.3㎝, 높이 5.9㎝인 이 불상은 중문터 불상과는 달리 대좌와 불신을 별도로 주조했다. 가슴 등지 일부분에 금박이 남은 이 불상은 머리가 소발이며, 육계는 일부분이 결실되었으나 높은 편이다. 얼굴은 거의 완벽한 원형이며 양 뺨은 통통하게 처리했다. 역시 통일신라시대 후기 작품으로 평가된다.
동탑 불상 |
기와류는 통일신라-고려시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 이들 기와 중에서는 '영축'(靈鷲)이라는 사찰 이름을 새긴 것이 있는가 하면 '大官'(대관), '三寶'(삼보)와 같은 문자 새김 유물도 있다.
김우림 관장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영축사를 고고학 발굴을 통해 확인했다는 점에서 이번 조사는 의의가 있다"면서 "향후 탑터 하부 조사와 사역 범위 확인 등을 위한 연차 발굴을 하겠다"고 말했다.
명문기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