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족산성"
성의 축조 연대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그 이름을 삼랑산성(三郞山城) 혹은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 한다.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기간에, 프랑스 신부 9명을 비롯해 8천여명의 조선인 신도가 처형 당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1866년 병인년에 군함 7척, 병력 1천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강화성을 점령한다. 하지만 양헌수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에 큰 타격을 주며 500여명 규모의 정예부대를 편성해 정족산성 진입계획을 실행해 강화도를 되찾게 된다. 병인양요 때 양헌수 장군은 이곳 정족산성에 보관된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지켜냈다.

[경인일보=목동훈기자]병인양요는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을 침략, 강화도를 점령했던 사건이다. 조선이 서구열강과 한반도에서 대결한 첫 전쟁이다. 그동안 조선을 침략한 세력은 몽고족, 여진족, 한족 등 북방민족과 남방의 일본이었다. 당시 강화도는 수도권 방어를 위한 '사령부'이자 '항쟁처'였다. 하지만 서양세력이 조선을 넘보는 병인양요부터는 조선의 '관문'이자 '최전선' 구실을 한다.

프랑스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명분으로 내세워 조선을 침략했지만, 그 속셈은 개국과 통상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는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 '개국과 통상' 등 당초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채 강화도(조선해역)에서 철수한다.

■천주교 박해

17세기 초부터 조선의 진보적인 유학자들이 천주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은 유교사상과 배치된다며 천주교를 이단시했다. 하지만 천주교는 서울에서 지방까지, 양반에서 천민 계층까지 퍼졌다.

당시 천주교는 조선의 신분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였다. 조선 조정은 정조 9년(1785년) '천주교 포교 금지령'을 내놓는다. 본격적인 천주교 탄압은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1801년 신유박해로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비롯 이승훈, 이가환, 정약용 등 천주교를 믿거나 가까운 남인 계통 학자들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형을 받는다.

1839년에는 3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들이 처형된 기해박해가 있었다. 이 사건은 프랑스를 자극하게 된다.

병인양요가 일어난 1866년 초에는 당시 9명의 프랑스 신부와 8천여명의 조선인 신도가 처형되는 참극(병인박해)이 빚어졌다. 이때 중국으로 몸을 피해 병인박해를 프랑스에 알렸던 리델 신부는 같은 해 프랑스 함대를 타고 다시 조선을 찾는다. 이것이 병인양요의 시작이다.

■프랑스의 침략작전

프랑스 함대의 조선 침략은 크게 1차와 2차로 구분할 수 있다. 1차는 침략을 준비한 정탐이고, 2차는 실질적인 실력 행사였다.

1866년 7월 8일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에 도착해 로즈 극동함대 사령관에게 조선의 천주교 박해 사실을 알린다.

로즈 제독은 프랑스 해군성과 베이징 주재 대리공사 벨로네에게 군사적 응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해 9월 18일 로즈 제독은 프리모게호, 타르디프호, 데루레드호 등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체푸항을 출발한다. 통역은 리델 신부가 맡았다. 이는 조선해역을 정찰하고 한강 수로 입구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팔미도, 작약도, 강화도 해역을 정찰하고 한강 수로 입구를 찾는데 성공했다.

조선은 한강을 탐측하러 온 프랑스 함대에게 식료품을 주는 등 '자비로움'(?)을 보인다. 프랑스 군인으로 병인양요에 참전했던 앙리 쥐베르는 1873년 '르 투르뒤몽드'에 쓴 글에서 "(조선인은) 거대한 부채라든가 황소 등을 우리에게 선물하는 선량한 마음을 지녔다"고 했다.

프랑스 함대는 한강 상류를 향해 항진을 계속했고, 조선은 이들의 도성 접근을 차단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9월 26일 프랑스 함대와 조선군이 처음으로 충돌한다.

조선은 프랑스 함대의 항진을 저지하지 못했고, 프랑스 함대는 마포 앞 서강(西江) 어귀까지 진입한다. 그러나 타르디프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는 일이 발생했고, 프랑스 함대는 27일 가까스로 한강 하류로 퇴각했다.

이때 프랑스군은 그해 8월, 대동강에서 서양 선박 1척이 불에 타 침몰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그 유명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다. 이는 1871년 신미양요의 발단이 된다.

프랑스 함대는 9월 30일 작약도를 떠나 체푸항으로 귀환했다.

10월 11일, 로즈 제독은 7척의 군함, 1천여명 규모의 병력을 이끌고 재침, 강화도 갑곶진 상륙작전을 벌였다. 로즈 제독은 강화도를 점령하면 한강을 봉쇄, 조선에 위협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목적은 강화도 점령이었다.

   
▲ "문수산성"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 문수산에서 해안지대를 성채로 연결한 조선시대의 산성으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성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과의 격전으로 해안 쪽 성벽과 문루가 파괴되고, 성내가 크게 유린되었다. 당시 초관 한성근 부대는 이곳 문수산성에 잠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을 기습 타격했다.
/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

■프랑스, 강화도를 빼앗다

10월 14일, 조선은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상륙한 사실을 뒤늦게 안다. 로즈 제독은 15일 강화성의 전력과 방어 실태를 파악한 뒤 다음날 강화성으로 진격한다. 프랑스군은 우세한 화력으로 강화성 남문을 공격했고, 조선군은 강화성을 버린 채 서문으로 도망쳤다.

강화성을 점령한 프랑스군은 다량의 금·은괴와 주요 문서, 서적류, 무기류 등을 노획했다. 여기에는 2011년, 145년 만에 임대 방식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도서도 포함돼 있었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군이 강화성을 점령하자 강화도 병력을 늘리고 도성 방어 태세를 강화한다.

순무천총(巡撫千摠) 양헌수 장군은 격문을 통해 프랑스군의 침략을 비판하고 회담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로즈 제독은 프랑스 선교사 처형 문제를 꺼내 '프랑스 선교사 학살과 관련된 3정승 엄벌', '수호조약 초안 공동 작성' 등을 요구했다.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조선, 강화도를 되찾다

양헌수(1816~1888)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10월 18일 통진부에 주둔하면서 프랑스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양헌수 휘하 부대는 문수산성에 잠복해 있다가 프랑스군 정찰대를 기습공격, 타격을 준다. 문수산성에서 사상자를 낸 프랑스군은 충격을 받았다. 문수산성은 강화도에서 육지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양헌수 장군은 전국의 실력파 포수들로 구성한 500여명 규모의 정예부대를 편성, 11월 7일 정족산성 진입 계획을 실행한다. 이를 눈치 챈 올리비에 대령은 11월 9일 150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정족산성으로 향한다. 조선군은 매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을 격파했다.

조선군은 화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근거리 유인 사격, 지형적 이점으로 공격력을 발휘한 것이다. 프랑스군은 사상자가 속출했다. 프랑스군은 11월 10일 강화 유수부의 관아 등을 불사르고 갑곶나루로 이동, 11월 18일 인천 앞바다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피해와 의미

병인양요는 조선이 승리한 전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조선의 피해도 적지 않았다.

'신편 강화사'에 따르면 프랑스 함대가 한강 수로를 봉쇄해 도성으로의 생필품 반입이 중단됐다. 도성에서는 물가가 폭등했고, 정국도 극도의 혼란상황으로 빠졌다. 양천, 김포, 통진, 부평 등에 사는 주민들은 프랑스 함대의 침입을 우려해 피란을 떠나기도 했다. '관문' 구실을 하는 인천 앞바다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차 침략 때는 강화도가 방화와 약탈에 시달렸다.

조선이 프랑스 함대의 무력시위에 굴하지 않고 맞붙어 싸운 점은 높게 평가된다. 하지만 재래식 무기로는 서양의 강력한 대포와 빠른 화륜선(火輪船)을 저지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는 '병인·신미양요사'에서 "병인양요는 전근대적인 조선군과 근대화된 프랑스군 사이에 이루어진 전투기법 내지는 화기 성능을 비교하는 하나의 실험장이 된 사건이었다"고 했다.

프랑스는 조선 원정 실패로 국가적 위신이 크게 떨어졌다.

※ 한반도주변 열강들 정세

佛, 러시아 남진 저지 명목 공격준비… '무력충돌 우려' 淸 불간섭정책 고수

병인양요 시기에 조선, 청나라, 프랑스 등 3개 국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들 나라는 복잡한 이해관계 속에서 자국을 보호하거나 이득을 취하려고 했다. 그런 모습은 현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의 조선 침략은 '서구 자본주의 세력'이 '동아시아 전통적 국제질서'를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자 프랑스는 원료를 얻고 상품을 판매할 곳이 필요했다. '천주교 박해에 대한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개국'과 '통상'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의도였다.

   
▲ 인천 강화역사박물관에 전시된 병인양요와 정족산성 전투장면.
/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

병인양요 발발 전, 프랑스는 조선을 직접 상대하지 않았다. 청나라를 창구로 삼고, 청나라에 압력을 넣었다.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관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나라는 '소극적 불간섭정책'을 유지하며 프랑스와 조선과의 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한다. 무력충돌이 두려웠던 것이다.

청나라는 아편전쟁 이후 프랑스와 근대적 조약 관계를 체결했고, 조선을 위해 프랑스에 대적할 군사력이 없었다. 병인양요 당시 청나라가 한 일은 프랑스에 화해를 권고하고, 조선에 프랑스의 침략계획을 알려 준 것 뿐이다.

중국에서 태어난 한중관계 전문가 권혁수 박사는 저서 '근대 한중관계사의 재조명'에서 "조공관계 속에서 중국의 커다란 그림자 뒤에 '은둔'해 있던 조선은 부득불 서양열강의 침략 위협 앞에 직접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권 교수는 병인양요를 "한중 두 나라 사이의 전통적 조공관계의 몰락을 예고해 주는 역사적 사건이었다"고 했다.

병인양요에는 일본과 러시아도 얽혀 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가 발생하자 일본에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2명의 사신을 조선에 파견해 "평화의 길을 택하라"고 권고하는데 그쳤다. 일본 역시 청나라와 마찬가지로 서양에 맞설 상황이 아니었다. 1864년 2월 러시아가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프랑스와 영국의 힘을 이용해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고 했다. 그 전략은 프랑스 선교사의 협조를 얻지 못해 실행되지 못했다. 프랑스 게랭 제독은 1856년 7월29일부터 한 달 동안 조선해역을 탐측한 뒤 해군성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게랭 제독은 보고서에서 "조선은 국력이 매우 허약한 상태이므로 열강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러시아가 이미 조선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프랑스는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라도 선수를 써야 한다. 식민지를 건설하는데는 군사적인 점령이 최선의 방책이다"고 했다.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약 10년 전부터, 프랑스와 러시아가 조선을 차지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1905년 '을사조약'으로 프랑스도, 러시아도 아닌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