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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박2일 대마도 이즈하라 덕혜옹주결혼봉축비/대마역사민속자료관

박근닷컴 2013. 7. 31. 18:36

 

 

 

 

위의 사진... 계단 아래,위를 살펴 보면 돌의 재질과 보수한 시기가 다름을 알수있다.

이와같이 부실된부분을 전부 보수하지않고 일부분을 수리한 흔적을 볼수있는데 거리를 지날때 다리 또는 차도 등에서도 볼수있었다.

수시로 갈아치우는 우리나라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다.

 

대마민속역사자료관에 보관중인 표서예방매일기(表書禮方每日記)에는 1732년 3월 그믐날 이즈하라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시 전체가 불길에 휩싸이고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탄 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다.

 

 이즈하라 골목길을 다니다보면 성벽처럼 축성한 돌담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대 화재 이후 불이 나더라도  옆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위해 쌓은 방화벽이다.

 

 

 

 

 

 

하치만구신사에서 덕혜옹주결혼봉축비를 가는중에 길거리다.  버스가 주차되있는 주차장이 티아라몰 맞은편이다.

 

 

우측으로 유치원...오른쪽 상부로 고려문이 보인다.

유치원을 지나 뒷편에 금석성터가 있으며 내부에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있다. 비를보고 언덕을 올라가면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이 있고 고려문으로해서 이 유치원옆으로 돌아 나온다.

 

 

 

대마도시청을 지난다,.

 

 

금석성 안으로 통하는 정문(노문 櫓門-야쿠라문) 이곳 내에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가 있다.

 

대마호텔 옆에 池神社(지신사) 위치에 대마도주 관아가 있었는데  쯔쯔지방에 살고 있던 <종씨형제>가 도주자리를 찬탈하기 위하여 관아에 불을 질렀다.

잠자던 도주가 혼비백산하여 이곳 산등성이로 도망쳐와서 <도주관아>를 건축하고 20대까지 이곳에서 도주생활을 했던 곳이다

대마도를 중흥시킨 <21대 소 요시자네>가 <사지키바라>에 이즈하라성을 축성한 후 화재로 소실되었고 입구문도 그때 소실된 것을 근대에 재건축 하였다

 

다른 설로는,  소오요시자네(宗義眞) 때가 대마도의 황금시대였다. 조선무역이 잘 되어서 대마도가 제일 번성하고 대규모의 사업이 실행되었다.

금석성은 그러한 시기인 1669년에 소오요시자네(宗義眞)가 건설한 성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天守閣(천수각)이 있는 호화롭고 장대한 성이 유행했지만 대마도의 성에는 천수각이 없었다.

寬文 9년(1669) 소오요시자네(宗義眞)가 망루를 구축했다

 

성터에는 대마도의 돌담 기술을 엿볼 수 있는 돌담과 성벽이 잘 남아 있고 한구석에는 훌륭한 정원터가 남아 있다.

대문의 망루는 1813년 화재로 없어졌다가 중앙의 막부(幕府)에서 복구비 이천 냥을 빌려서 다음 해인 1814년에 재건했는데, 그것이 1919년에 ‘교또(京都)’어디론가 팔려갔다는 설을 남긴 채 해체 망실되고 말았다.

성의 정문인 누문은 다이쇼 8년까지 남아 있었지만 해체되어졌으며 현재의 櫓門(노문-야쿠라문), 平成(헤이세이) 2년(1990년) 11월에 복원되었다  

 

 

 

 

안쪽에서....누로 오르는 계단이 오른쪽에 보인다.

 

 

금석성 경내에 있는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안내판에는 [이왕가종가어성혼기념비]라고 되 있다 이것은 '이왕가'-대한제국의이씨황가를 말하고

'종가'는 대마도를 다스리던 소씨 가문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비석은 이씨황가와소씨가문이 혼인한것을 기념해

세워진 비 인것이다.

 

 

백색에 무궁화 꽃이 할짝 피어있다.

 

 

 

덕혜옹주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고종(高宗)과 후궁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이 회갑연에 얻게 된 딸로,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그러나 1925년 4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끌려갔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강제 결혼하였다

두 사람이 결혼을 하자 당시 대마도인들은 무척 자랑스러워했으며 대마도에 사는 조선인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인들은 `상애회(相愛會)'라는 것을 만들어 기념사업을 펼치기까지 했으며 대마도인들은 기념식수를 하기도 ?다. 
이즈하라 중심 팔번궁 신사 앞 광장에는 기념비까지 세웠다.
그 비의 이름이 `이왕가종가어성혼기념비(李王家宗家御成婚記念碑)'였다. 
지금의 서일본은행(西日本銀行) 자리에 세워졌던 그 비는 높이 2.3m, 폭 1m짜리의 것이었다. 대좌(臺座)에는 조선인들의 이름도 새겨 놓았다.
 
그러나 그 후 종무지와 덕혜옹주 두 사람이 이혼을 하자  그 비석과 나무는 모두 뿌리째 뽑혀 사라져버렸다. 조선을 멸시하는 기운이 팽배해지면서 대마도 사람들이 없애버린 것이다.
대좌는 금석장(金石場) 문 밖에, 기념비는 성 풀장 바깥에 내다버렸다. 그나마 1975년 이후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2001년 <씨플라워호>취항 후 관광객이 불어나자 이를 찾아내어 지금의 자리(금석성 성내)에 다시 되세웠다

이것은 우리 한국 관광객을 노린 순전히 장사 속으로 다시 세운 것이다.

주변에 심어논 무궁화 우리나라꽃... 누구를 위한 배려인가? 상술인가....

 

 

 

 

 역사민속자료관 가는길

 

대륙과 가장 가까운 국경의 섬 대마도는 그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옛부터 한국과 일본과의 문화교류에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를 실증하는 참고자료를 비롯해서 중세부터 근세에 이르기 까지의 고문서,고기록 등 귀중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대마역사자료관의 안내서에도 "대마의 문화사는 한반도와의 교류사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고 적혀 있다. 엄밀히 말해 교류가 아니고 조선으로부터 배우고 얻어오고 약탈해 온 수많은 유물과 문화재들이다.  

대마도에는 두 곳의 역사 자료관이 있다.

이즈하라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과 중대마의 '미네'에 있는 "미네마치역사민속자료관"이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이즈하라시의 가장 중심가인 이즈하라우체국과 문화교류센터에서 150여m  거리에 있는 쯔시마 시청 앞에 있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를 도입하는 요충지로서 위치한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각종 민속자료,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隆起文).무문(無文) 토기도를 비롯해 조선통신사들의 행적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서들이 많고 대마도의 민속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특히 조선과 대마도의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약 46,000점의 방대한 종가문서(宗家文書)가 있다.

이는 조선과의 외교·무역문제의 처리, 대(對) 막부 관계와 이들에 관한 기록의 필요로 만들어진 것으로 모두 번청(藩廳)의 기록물이다

 

 

 대마민속자료관의 주요 문화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조선통신사 두루마리 행렬도

      2. 초량왜관도

      3. 한글토가 달린 히라가다 책(첩해신어)

      4. 초량(부산)왜관도

      5.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그림도

      6. 고려판 대반야경(초조대장경-11세기)

      7. 고려청자. 다완 등 자기류

      8. 훈몽자회

 

 

 

 

 

 

조선통신사행렬그림 두루마리

 

말을 타고 있는 통신사의 도포자락, 수염까지도 묘사를 한 그림의 세밀함과 규모가 놀라우며 채색이 맑고 선명한게 분명 우리나라 화공의 솜씨일텐데 누가 그렸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림을 보면, 모자를 쓰고 말 위에 올라탄 이들은 모두 조선인, 모자 벗고 걸어가는 이들은 일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어 당시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 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다.

이 행렬도의 두루마리의 길이가 13.9m라고 하니 그 행렬의 실제 길이는 상상을 초월한다. 위의 사진은 아주 작은 일부분이다

 

 

 

팜플렛 사진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접대 상차림 그림도

조선 통신사가 왔을 때 기본적으로 상에  올려야할 음식들 그림이다

 

 

 

 

첩해신어

 조선 선조 역관() 강우() 지은 일본어 학습서. 일본어 히라가나(hiragana) 쓰고 한글 달았다.

1627(인조 5) 역관 학령() 교정하여 간행하였으며, 1676(숙종 2) 중간()하였다. 10 10책이다.

 

 

 

 

 

 

역사 자료관에 들어서면 큰 종이 놓여있다.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종무지宗武志)의 그림으로 아소만을 배경으로 그렸다고 한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을 들어서면 입구의 바로 오른쪽 벽에 결려 있다.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비

 

성신지교린비는 쯔시마 시청 앞, 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가 있는 대마역사 자료관 앞 뜰에 서 있다.

비석 뒷면에는 우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대마도 유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교린(交隣)-이웃나라와 평화롭게 지냄

 

조선을 사랑했던 아메노모리 현창비

조선 후기 한·일 관계를 우호적으로 이끄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1668-1755)의 현창비(顯彰碑: 뚜렷한 공적을 기리는 비)로 고려문 위쪽에 있다. 그러나 비를 보기 위해서는 나가사키 현립 역사자료관 앞에 있는 이즈하라마치 향토자료관(고려문 위에 있는 건물) 마당으로 가야한다.  "誠信之交隣"이란 1728년에 그가 쓴 『교린제성』(交隣堤醒: 이웃 나라와의 교제에 있어서 잊어버린 것을 깨우친다)의 핵심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교역은 성실과 신뢰를 바탕으로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메노모리 호슈

에도시대 대마도에서 관리로 활약햇던 인물로 일본최고 유학자중 한면으로 꼽힌다

조선말뿐만아니라 한문과 중국어에도 능통해 조선과 이론의 교류에 큰역활을 했다.

 

아메노모리 호슈는 1689년 쓰시마번에 임관하여 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하였고 동문인 아라이 하쿠세키가 도쿠가와 장군을 일본의 국왕으로 표현한 것을 비난한 왕호사건으로 유명하다. 특히 부산 왜관에 와서 3년간 조선어를 공부하고 대마도로 돌아가 1727년 3년 과정의 "조선어학교"를 개소할 정도로 조선과 유학을 숭배하였으며, 그로 인해 일본 최초로 한글 교습소가 대마도에서 생겨나기도 하였다.

아메노모리 호슈가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 계기는 6공화국때 노태우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하면서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호슈의 '성신지교린'을 예로 들면서 부터였다.

 

 

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

선조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 467명을 시작으로 1697~1811(210년)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 통신사를 기리며 양국의 선린우호관계를 교훈삼아 21세기의 한일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1992년 세운 비석이다.

 

 

조선통신사 일행은  조선정부의 최고 관료와 학자, 문화인을 비롯하여 화려한 악대,무인, 통역관 등 300~500명 정도의 인원이었으며 조선의 앞선 문화로 인해 일본인들에겐 하나의 "문화적 충격" 을 가져다 주었고 당시 통신사 일행을 구경하기 위한 인파를 "누에"와 비교할 정도이니 그 광경을 짐작할만하다.

대마도번이 조선통신사 방문 전후 3년간의 행사 준비 및 행사에 사용되는 돈이 100만냥(약 5580억)이나 되었다고 한다

 

통신사 일행이 묶었던 숙소에는 수많은 일본의 학자들과 문인들이 조선의 학문과 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모여들었고 우리 조선통신사를 모티브로 한  가라코오도리와 후시미,이즈모 등의  인형들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려문>

 

지금의 대마호텔 옆에 있는  지(池:지)신사위치에 대마도주 관아가 있었는데 쯔쯔지방에 살고 있던 종(宗-소우)씨형제가 도주자리를 찬탈하기 위하여 관아에 불을 질렀다.

잠자던 도주가 혼비백산하여 이곳 산등성이로 도망쳐와서 <도주 관아>를 건축하고 20대까지 이곳에서 도주생활을 했던 곳이다

 

이즈하라의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제21대 도주 소 요시자네가 사지키바라성(금석성金石城)을 만들고 정문 즉 영은문으로 만든 문이다.

사지키바라성 앞에 세우고 <고려문>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매우 흥미로운데 <조선통신사>를 맞이할 때 이 문을 통과했기 때문에 <조선통신사 맞이문>이라고도 한다. 화재로 소실 된 것을 재건축 하였다

 

현재의 고려문은 원래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끼바라 성에 있던 것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 하였으며 그러다가 1989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진 부재를 수습하여 이곳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고려문이란 이름은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성문밖에서 본 금석성  노문(야쿠라문)

 

금석성은 여느 일본의 성들과는 다른 다음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첫째, 일본 성의 특징인 천수각(天守閣 :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게 높여 전시에 성주가 지휘를 하는

         망루 겸 평상시에는 성주가 정무를 처리하는 제일 높은 건물)이 없다 .

둘째, 항구에서 성까지의 대로를 일직선으로 조성했는데, 이 역시 일본 특유의 방어위주 축성원칙에

         크게 벗어나는 점이라 한다.

셋째, 고려문이 성 안에 제삼문(第三門)으로 있었다고 한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금석성은 전투를 목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조선과의 선린외교를 영위해 나가는데 필요한 영빈적 목적이 더 컸던 것으로 보여진다.

 

 

유치원건물...가이드가 창문을보며... 우리나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창문과 비교해보라고 한다.

에너지절약과 시력보호를 위해 자연창을 많이 내었으며 일본에 안경낀 어린학생들이 드물다고 말한다.

 

- 通信使(통신사)란1697~1811(210년)까지12회에 거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정부 사절단이다.

 

1598년8월18일 임진왜란의 원흉 히데요시가 죽고 그의 어린아들 히데요리가 뒤를 있으니 일본(왜)은 퇴각을 결정한다.

전쟁의 길목에서 시달리던 대마도주 종의지(宗義智)는 그의 장인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도움으로 일본의 퇴각에 맞추어 조선에 사자(使者)를 보내 강화에 나선다.

 

대마도주로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과거처럼 조선과의 관계로 돌아가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명나라의 반대로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피로인(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중 귀국한 사람들의 보고서(간양록)을 보고서 강화를 시작하려 하였고

이즈음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히데요리가 있는  오사카성을 점령하고 일본의 유명한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연다.

 

대마도주는 이때를 노려 강화 조약을 맺지 않으면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다시 군사를 움직일것이라며 조선과의 국교회복(무역 교역)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조선에서는 사명당 (송운대사,유정이라고도함)을 탐적사로일본에 파견한다. 사명대사는 이에야쓰를 만나보고 이에야쓰는 왜란에 관여하지 않은 사람이고 조선과 통화(通化)를 원한다는것을 확인하고 드디어 1697년 통신사를 파견하기에 이른다

 

임진왜란 이후 대마도는 우리나라와 국교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그 결과 도쿠가와 막부 260년간 12차례에 걸쳐 통신사들이 일본을 방문했다고 하며, 처음에는 막부 장군의 장군직 계승 등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임무였으나 차츰 국서교환 등의 임무가 주어지는 등 외교적 활동을 넓혀갔다고 한다.

 

이러한 통신사 제도는 1811년 일본측의 역지빙례 정책(易地聘禮 : 외국의 사신을 본국 중심부로 들이지 않고 그 나라와의 접경지대에서 예를 다함)에 의하여 우리 통신사는 대마도에 묶게 된다.

 

이 때 조선통신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 본토에서 대마도로 이동한 고관들이 묵었던 임시 주택을 마련하게 되는데 모두 13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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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나라를 알고자 여행가이드 이야기와 자료를 찾아보고 정리를 하였다.

대마도 1박2일 일정의 이야기속에 역사 이야기는 인터넷블러그 솔뫼님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2012.07.05 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