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관총은 소지왕릉?
1921년 9월 말, 경주의 하늘이 대낮에도 침침했다. 대륙에서 불어닥친 황사 때문이었지만, 민심은 흉흉했다. 일본인들이 황금유물을 파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70대 노파는 발굴 현장 한복판에 주저앉아 ‘1인 시위’를 벌였다. ‘임금님 무덤 파는 것이 웬말이야!’는 구호를 외치며…. 그렇게 출토된 금관을 비롯한 황금유물들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당대 일제는 ‘일본 영토에서 처음 발견된’이라는 수식어를 쓰며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홍안박명(紅顔薄命)’이라 했던가. 금관총의 팔자는 셌다. 1927년 12월, 금관을 제외한 금제 허리띠와 장식 등 90여점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가혹수사 논란까지 빚으며 경주 읍내를 이잡듯 뒤졌지만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범인은 사건 발생 6개월이 지난 뒤 도난품 일체를 경찰서장 관사 문밖에 두고 사라졌다. 1956년 3월엔 전시장에 진열한 금관 모조품이 도난 당하는 수난도 겪었다.

올 7월 초 금관총 출토 환두대도를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斯智王)’이라는 명문이 확인됐다. 금관총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이 어떤 역사기록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설왕설래만 있을 뿐이다. 그 가운데 황금유물 전문가인 이한상 교수(대전대)의 ‘추정’이 흥미롭다. ‘이사지왕’의 ‘이(이)’자가 사전대로 ‘그(其)’, 혹은 ‘이(此)’의 의미라면?
그렇다면 ‘이 사지왕’은 ‘그 분이나 혹은 이 분’인 ‘사지왕’이 아닐까. 그 경우 ‘사지왕’은 ‘소지왕(재위 479~500년)’이 아닐까. 이 교수는 금관총에서 출토된 허리띠 꾸미개(사진)가 백제 송산리 4호분(동성왕 시대·479~501년)의 출토품과 디자인 및 크기가 일치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 대목에서 “493년, 백제 동성왕이 신라 이찬 비지(比智)의 딸과 혼인했다”(<삼국사기>)는 기록을 떠올린다. 고구려의 남진에 맞서 ‘결혼동맹’을 맺은 백제와 신라…. 결혼동맹이라면 최소한 왕족의 딸을 백제왕(동성왕)에게 시집보냈을 것이다. 그러면서 당대 최고의 장인(匠人)이 제작한 허리띠 2세트 가운데 한 세트를 혼례품으로 하사하지 않았을까. 결국 딸을 시집보낸 ‘비지(比智)’는 명문에 나오는 ‘사지(斯智·소지왕?)’와 혈연관계인 왕족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소지’와 ‘사지’, ‘사지’와 ‘비지’…. 그럴 듯한 퍼즐 맞추기 같기는 한데….
어떻든 발굴 92년 만에 홀연히 나타난 이사지왕은 후손들에게 슬쩍 수수께끼 한 문제를 던진 셈이다. ‘내가 누구게~.’
경향신문 이기환선임기자
'☆-행사·새소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0) | 2013.09.04 |
---|---|
[스크랩] <경주를 너무도 사랑한 경주학자 고 이근직> (0) | 2013.08.30 |
해인사 마애불 1천200년 만에 공개된다 (0) | 2013.08.16 |
[조선일보 기사 스크랩] 석가탑 속 4.6㎝ 금동불 발견 (0) | 2013.07.21 |
[스크랩] 제2회 경주실크로드 국제학술회의 (0) | 201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