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새소식

[스크랩] 일제 날치기 조사 94년만에…경주 금관총 공식 재발굴

박근닷컴 2015. 3. 6. 00:16

일제 날치기 조사 94년만에…경주 금관총 공식 재발굴

등록 : 2015.03.02 19:58수정 : 2015.03.02 19:58

 
2일 낮 경주 노서동 금관총 봉분 앞에서 열린 발굴 고유제의 한 장면. 느티나무 고목이 서있는 봉분 앞에서 젯상을 차려놓고 제관들이 절하고 있다.

첫 발굴 기록사진조차 없어
당시 유물 나온 곳도 불분명
국립중앙박물관·경주박물관
“무덤 얼개 확인부터 해야”

“신라고분릉주 신이시여! 발굴조사 기간 하늘과 땅은 고요하고, …님들의 위대한 자취가 만방에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게 굽어 살펴 주옵소서!”

봄기운 가득한 신라고분의 둔덕, 그 위에 터박은 느티나무 거목 앞에서 제관이 기원문을 읽는다. 2일 낮 경주 노서동 고분공원에서는 금관총 발굴 성공기원 고유제가 열렸다. 성덕대왕 신종 소리가 뎅뎅 울려퍼지는 가운데 다른 제관들이 정성껏 토기를 본뜬 잔에 술을 담아 바쳤다. 금관총 무덤 앞에 모여든 시민 200여명의 눈길이 돼지머리와 금관모형이 바쳐진 젯상, 타오르는 혼불에 모아졌다.

금관총은 1921년 처음 금관이 나오면서 고대 신라 황금문화의 서막을 열었던 유적이다. 이번 발굴은 그해 9월 주막집 공사를 하다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에 대한 미완의 조사를 94년 만에 마무리한다는 뜻을 지닌다. 당시 조사는 엉망진창이었다. 무덤이 발견된 직후 주민들과 일본인들은 부장품들을 도굴하듯 쓸어가버렸다. 무덤에서 나온 구슬을 아이들이 갖고 놀다 순사의 눈에 띈 것이 유적이 알려진 단서가 됐다. 뒤늦게 이뤄진 총독부와 일본 교토대의 조사도 사흘 만에 마무리됐다. 어떻게 조사가 정리되고, 이후 관리가 진행됐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 사진, 도면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박물관이 경주 고분의 첫 재조사 대상으로 금관총을 꼽은 것도 보고서를 쓸 수 없을 만큼 당시 조사 자료가 거의 없어, 직접 파보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제례를 주관한 중부동 청년연합회 이근훈 회장은 “후손으로서 무덤 주인을 모르는 상황이 부끄럽다. 조사에서 왕릉주인을 속히 찾는 게 소망”이라고 했다. 그러나 6월까지 진행될 조사에서 이런 소망이 실현되기란 쉽지않다. 김대환 학예사는 “초점은 무덤주인이 묻힌 자리, 곧 매장주체부 얼개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1년 조사 당시 금관과 칼 등 유물들이 나온 곳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부장품과 주검이 묻힌 곳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어느 정도 남아있다면 어떤 얼개인지 확인하는 것이 관건이다. 2년여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21년 이 무덤 출토품인 둥근고리큰칼에 ‘이사지왕’ 명문이 새겨져 있음을 확인하면서 명문에 나온 왕이 금관총에 묻힌 인물인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는 것도 변수다. 칼은 부장자 머리맡에서 나왔다는 증언이 전해지지만, 이번 조사에서 칼이 나온 위치가 다르게 확인된다면 새 국면을 맞게된다. 칼이 나온 위치가 부장자의 실제 소지물로 판단할 만큼 주검 곁에 가깝다면, 그에 따라 ‘이사지왕’이 묻힌 이의 이름이 될 수도 있다. 봉분이 대부분 사라지고 기반부 일부분만 언덕처럼 남은 금관총 지름은 46m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둘레 호석이 부근의 신라최대 고분인 봉황대와 연결될 가능성이 있어 주목된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출처 : 경주학연구원 慶州學硏究院
글쓴이 : 마립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