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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강동 양동마을 공부하기

박근닷컴 2010. 8. 27. 02:57

1. 양동마을은

 

양동마을(중요민속자료 제 189호)은 경주시 강동면의 안강평야 동쪽에 위치해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대표적 동족 부락으로, 54호의 양반가옥과 이를 둘러싼 110여호의 서민층 초가로 이루어져 있으며  "월성손씨"와 "여강이씨"의 두 문중이 자리하고 있다.

 

월성손씨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양민공 손소와 우재 손중돈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양민공 손소(1433-1484, 안동부사,진주목사,이조참판 역임)는 양동마을의 풍덕류씨 류복하의 무남독녀와 혼인을 통해 처가재산을 물려받으면서 양동마을에 터를 잡았으며, 그의 5남 3녀중 2남이 청백리 우재 손중돈(1463-1529, 중종시절, 공조판서,이조판서,세자빈객,도승지 세번, 대사간, 대사헌 4번,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함경도등의 관찰사) 선생이다. 

 

월성손씨의 대표 가옥으로는 월성손씨종택인 서백당(1454, 우재 손중돈과 회재 이언적이 태어난곳) 과 관가정(우재 손중돈이 살던집이자 정자, 보물 442호)이 있다.

 

【 ※  손소: 이조참판(행정자치부 차관) 】

【 ※  손중돈: 공조판서(국토해양부 장관), 이조판서(행정자치부 장관), 세자빈객(왕세자 교육),
                     도승지(비서실장), 대사간(감사원장), 대사헌(검찰총장), 관찰사(도지사) 】

 

여강이씨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회재 이언적 선생을 들 수 있는데

 

손소의 1녀는 여강이씨인 이번과 혼인하여 3남을 낳았으나, 남편이 일찍죽자 그 자제들은 외삼촌인 손중돈의 그늘아래 성장하였으며, 그 중 2남이 회재 이언적(1491-1553 중종,인종시절, 주리적성리학의 대가, 이조판서, 형조판서, 예조판서, 경상도관찰사, 우찬성,좌찬성) 선생이다.  

 

【 ※  이언적: 이조판서(행정자치부 장관), 형조판서(법무부 장관), 예조판서(교육과학기술부 장관) 
                     관찰사(도지사), 우찬성 좌찬성(종1품 부총리) 】

 

여강이씨의 대표 가옥으로는 여강이씨종택인 무첨당(보물 411호)과 향단(보물 412호, 경상도관찰사 이언적의 노모간병으로 위해 중종임금이 지어준 집)이 있다.

 

 

2. 양동마을의 입지 특성은

 

양동의 지세는 마을 북쪽의 설창산 문장봉에서 내려오는 산줄기가 물(勿)자 모양으로 뻗어내려 네 갈래의 능선과 세 계곡으로 이루어진 물자형국으로 형산강(북류)과 기계천(남류)이 반대방향에서 유입하여 양동마을앞에서 합류하게되는 길지이다. 양동마을은 설창산(163m) 남사면의 중턱과 계곡에 입지해 있으며, 평균고도는 55m정도이다. 

  

 

 

양동마을이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마을에서 다소 벗어나 산중턱에 입지하는 것은

 

1) 양동마을의 남쪽은 남류하는 기계천,  동류하는 칠평천, 북동류하는 형산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홍수가 빈번하게 발생하였으며, 특히

 

2) 기계천과 칠평천, 형산강이 합류하여 동쪽의 포항으로 흘러가며 만나는 규장암의 협곡(유강터널쪽)과

    동해로 유입하는 형산강이 만조(조차는 30~40cm)와 겹칠시 

    물빠짐이 원활치 못해 더욱 홍수의 피해가 컸던것으로 보여진다.      

 

3) 또한 현재보다 훨씬 빈약했던 삼림면적과 수리시설의 부족, 반복된 홍수로 인한 천정천화는

   안강평야와 양동마을의 홍수피해를 더욱 키웠고, 이에 양반가옥등은 설창산의 산중턱 사면상에 위치하게 된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