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왕후의 변함없는 사랑
안강읍에 있는 신라 흥덕왕릉. 능으로 가는 길은 먼 꼬불 길이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 마을 골목길로, 그리고 소를 키우는 축사 길을 돌고 돌아서있다.
능은 소나무 숲으로 촘촘히 가리어져 있고. 소나무는 나무들이 서로 뒤엉키고 휘어져 , 비틀려 마치 꿈틀거리며 하늘로 오르는 용처럼 보인다.
하늘을 가리는 푸른 솔가지에 꼬불꼬불한 나무 둥치는 대왕을 지키는 호위병들처럼 몇 겹씩 빽빽이
둘러서있다. 왕릉은 북쪽 연봉을 뒤에 업고, 비스듬한 야산 숲 속에, 남쪽을 향해 넓은 안강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826~836)릉은 38대 원성왕의 손자라 그런지 조부의 무덤인 괘릉과 흡사하다.
능에 이르는 신도 양쪽에 석주와 무인상과 문인상이 각 한 쌍씩 마주보고 서있고,
네 마리의 사자상이 앉은 자세로 각각 능의 사방을 지키고 있다.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그 면적 및 규모나 치장에서 신라 역대왕릉 중에도 단연 뛰어나고 호사스럽다.
묘지둘레에 호석을 둘러치고 그 사이에 십이지신 상을 새겼고, 그 앞에 둘러가며 돌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은 사람 키마한 석주 41개만 남아있다. 석주마다 상 하 두 곳에 원공이 뚫어져 있어 서로 관석을 끼운 것으로 추측된다.
능 전방 왼편 울타리 근처에 능비가 있던 자리가 있으나 지금은 비석과 이수는 없어지고, 그 밭침인
귀부만이 남아있다.
이 능은 신라 역대 왕 중 29대 무열왕릉과 함께 그 피장자가 확실한 능으로 알려져 있다.
삼십여 년 전 발굴 조사 때 주변에서 ‘흥덕(興德)’이라고 쓰인 비편이 발견되어
이 무덤이 흥덕왕릉임을 입증하였다.
왕은 11년의 짧은 재위기간 중 장보고로 하여금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케 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서해일대를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로 삼았다. 그리고 사신 대겸이 당에서 갖고 온 차나무 종자를 지리산에 심게 함으로써 지금 영호남일대 차의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귀족들의 사치가 극심하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짐에 따라 이를 규제키 위해 복식이나 수레, 가옥 크기를 제한한 사치금지령을 내려 쇠퇴해가는 신라사회의 개혁을 시도한 왕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흥덕왕 하면 조강지처인 왕비와의 일편단심 애틋한 사랑얘기로 더욱 잘 알려져 있다.
왕이 즉위한 두 달 만에 왕후 장화부인이 죽었다. 왕은 그의 형 소성왕의 딸로 조카이자, 아내인 그녀를 무척 사랑했었다. 그녀를 잃은 슬픔에서 항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왕을 측은히 여긴 신하들이
왕후를 다시 맞이할 것을 여러 번 간청했다.
그 때마다 ‘새도 제짝을 잃으면 슬퍼하거늘 하물며 좋은 배필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사람으로
어찌 다시 아내를 맞이하겠는 가’라고 거절 하였고, 시녀도 가까이 두지 않으면서 까지 그녀에 대한 사모의 정은 날로 더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본 어느 신하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앵무새 한 쌍을 가져와 왕께 선물을 했다.
얼마 후 암놈이 죽고 수놈만 홀로 남아 구슬프게 울었다. 왕은 거울하나를 구해 그 놈 앞에 걸어 주었다. 수놈은 거울 속에 있는 새가 제짝인 줄 알고, 거울을 쪼아댔으나 아닌 줄 알고부터 더욱 구슬피 울다가 지쳐 죽고 말았다.
이 가련한 모습을 본 왕은 더욱 슬퍼하며, 죽은 앵무새를 자기에 비유해서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전해 오지 않지만 아마도 죽은 자기부인에 대한 애틋한 사모의 노래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결국 깊은 사모의 정으로 인해 신병이 들었고, 더구나 부인과의 소생인 아들마저 승려 수명과 함께 당에 사신으로 갔다 오다가 바다에 빠져 죽자, 그 슬픔까지 안고지내다 세상을 떠났다.
재위 동안 줄곧 자기부인을 생각하며 슬픔 속에 살다간 임금이었다.
죽을 때 사랑하는 왕비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장화부인 옆에 합장을 했고, 그래서 일명 이능을 장릉(章陵)이라고도 한다.
이런 왕과 왕후의 변함없는 사랑이 함께 묻혀있는 능이라 그런지 부부들이 많이 찾아오는 모양이다.
능에 절하고 앞에 있는 석상을 문지르면서 소원을 빌면 부부의 정이 더욱 깊어진다는말이 전한다.
십이지신상 중에 아주 정교한 닭의 모습이다.
이 도상은 원숭이상
어두운 숲속 한켠에 거북이 한마리 ....
귀부 옆모습.
귀갑문도 제법 또렷하고 발가락도 잘 나와있다.
여기에 흥덕왕릉의 비가 있었겠지요. 비신은 사라지고 비신을받치던 귀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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