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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연구반답사 순천- 송광사

박근닷컴 2010. 8. 20. 03:57

 

 

 - 송광사 입구 하마비 -

이는 조선시대 고종의 51세 생일을 맞아 임금이 관음전이란 편액을써서 내려보내

왕실의 기도처로 관음전을 짓게해....왕실과 관련있어 하마비가 있다.

 

 

 

- 백과사전에서 옮김-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大吉祥寺)·수선사(修禪寺)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송광사사적비 松廣寺事蹟碑〉·〈보조국사비명 普照國師碑銘〉·〈승평속지 昇平續誌〉에 의하면 신라말 체징(體澄)이 길상사(吉祥寺)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修行結社)인 정혜사(定慧社)를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修禪寺)로 개명(改名)하라는 제방(題榜)을 내렸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 년 간 진각(眞覺)·각엄(覺儼)·태고(太古)·나옹(懶翁)·환암(幻庵)·찬영(燦英)·각운(覺雲)·무학(無學)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高峰和尙)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中印)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綸旨)로 설립된 수륙사(水陸寺)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그후 수선사가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應善)과 부휴(浮休)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일주문 -

모든진리는 일심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일심으로 돌아간다는...불교의 진리관이다.

 

-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 -

 

 공포가 화려하다.

 

소맷돌

 

 

 

 

 일주문- 다포식이면서 맞배지붕이다.

 

- 능허교/우화각 -

 

- 능허교 다리아래 철사줄에 꿴 엽전 -

 

다리 아래 엽전이있다. 순천 송광사 능허교. 무지개다리아래 용이 물고 있는

여의주에 철사줄에 꿴 엽전 세 닙이 매달려 있다. 
신도들의 시주를 받아 이 다리의 불사를 마치고 나니 엽전 세 닙이 남았더란다.

그 남은 돈을 고심 끝에 다리 아래 매달아 둔 것.

다만 다리를 고치거나 다시 지을 때만이 사용될 수 있는 돈이다.
승가에는 ‘호용죄’(互用罪)라는 것이 있다 한다. 어디어디에 써달라고 내놓은 시주를

그 목적이 아닌 다른 일에 쓰는 허물을 이르는 말.

오로지 한 목적 외에 쓰면 죄가 되는 ‘무서운 돈’을 무섭게 지킨 일화는

지금 아침저녁으로 울리는 송광사 범종에도 아로새겨져 있다.
깨진 종 불사를 하게 된 1977년 취봉 노스님이 뜻밖에 거금 150만원을 내놓으셨다 한다.

6·25전쟁 때 타버린 종고루 중창불사를 마치고 남은 돈을 한푼도 딴 곳에 쓰지 않고

 본전과 20여 년 이자를 고스란히 모아 두었던 것.
돈에 눈먼 속가의 사람들을 움찔하게 하는 서늘한 죽비소리.

마음대로 조화를 부린다는 여의주(如意珠)에 누구도 제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돈을

매달아 둔 것은 더욱 의미심장한 일이다.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 능허교(凌虛橋)

모든 속박을 벗고 걸림 없이 자유롭게 날아 오르는 우화각(羽化閣)을 지난다.
“한푼의 오차 없이, 한 생각의 빚진 마음 없이 인과에 분명한 이라야 이 능허교를 건너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음을 알리려는 뜻.”

송광사 현봉스님이 전하는, 능허교 아래 매달린 엽전 세 닙의 뜻이다.

 

 

앞의 누각은 임경당

임경당은 거울같은 물가에 자리한집 이란뜻.

 

능허교위에 우화각

능허란? 미인의 고운걸음걸이...

 

침계류 누각의 아랫기둥 누하주

윗기둥은 누상주라한다.

  

 

 

 

 

 

박물관

 

 

 

승보전

 

 

승보전 소맷돌

 

승보전은 옛 대웅전 건물을 손상없이 이건(移建)하여 원형 을 보존해 놓았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재현하여 석가모니부처님과 10대제자,

16나한(十六羅漢)그리고 1,250인의 비구제자상을 재현하였는데

송광사가 승보종찰임을 상징하는 법당이다.

 

승보전 측면

 

 

- 대웅보전 -

 

대웅보전 -지붕모양이 아자형(亞字形)을 하고있다.

이 건물은 1951년 소실후 1988년 8차 중창불사 때 당대의 최고 전문가들이 불사에 직접 동참하여 자기 연구 성과를 거리낌없이 반영한 것 .그 결과 우리 건축사상 목조 건물이 가질 수 있었던 온갖 장점을 결합하고 파생될 수 있는 온갖 결함을 배제하여

현대 감각에 알맞은 108평 순 목조 대웅전 건물을 이룩하였다.

 

 

 

 

대웅보전은 석가모니불 양쪽에 아미타불과 약사불이 협시하거나

삼세(과거,현재,미래)제도를 염원하는 삼세불-석가모니불(현재)연등불(과거)/미륵불(미래)이

협시하면 격을 높혀 대웅보전이라 부른다.

송광사 대웅보전은 각부처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문수/보현보살,지장보살도 모셨다.

 

 

대웅보전 뒤로 설법당이 보인다. 그옆으로 수선사(참선공간)와 국사전이 있다.

 

- 국사전 -

송광사 16국사의 덕을기리기 위해 그들의 영정을 봉안한 법당이다.

국보제56호로 조선초기양식을 지니고 있는 이건물은 하사당과 같은시기에 지어진것으로

맞배지붕에 주심포양식을 하고있다.

 

 

- 영산전/약사전 -

세칸짜리 영산전, 한칸짜리 약사전

 

약사전 천정

 

약사여래

 

 영산전 천정

 

 

 

영산전 내부에 팔상탱

 

영산전내 가마

 

승방입구

 

- 솟을지붕 -

솟을지붕은 전라도지방 살림집에서 볼수있다.

송광사에 솟을지붕이 승방과 하사당 두곳에 있다.

  

 

 승방

  

 - 하사당 -

솟을지붕은 환기장치로 부엌칸에있다.

송광사에 하사당은 승방중에 가장오래된 조선초기건물이다.

하사당 위의 건물이 상사당(노랑색건물)인데 송광사 제9대 담당국사가 보조국사부도 아래의 영천수를 마시고 삼일만에 깨달음을 얻었다하여 삼일암이라고도 불린다.

 

 

 

- 관음전 -

고종의 원당으로 지어진 관음전

 

 

소맷돌

 

 

 

 

 

 

 

 

 

 

 

 

 

 

 

 

 

 

- 종고루 -

우화각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있고, 그 다음 종고루(鐘敲樓) 밑을 통하여 절 마당(대웅보전)에

올라서게 된다.

불전4물이 있는 종루가 문루 역할을 하고 있다.

 

 

 

 

 

- 척주당/세월각 -

 

보조국사 고향수

 

 

- 보조국사 감로탑 -

불일 보조국사의 감로탑은 송광사 설법전 우측 현 관음전 뒤뜰 언덕에 있다. 보조국사는 고려시대 송광사 16국사중 제1세이며 또한 정혜결사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당시 고려후기의 불교계에 새로운 정신개혁 운동을 전개한 선봉자로서 한 시대의 부패한 현실을 정의롭게 이끌고자 했던 종교지도자였다. 국사는 세수 53세, 1210년(희종 6) 음력 3월 17일 열반하였다. 그 해(1210년) 희종이 ‘불일 보조국사(佛日 普照國師)’란 시호와 ‘감로탑(甘露塔)’이란 탑호를 내렸으나 바로 탑비와 탑이 세워지지 않고 3년 뒤인 1213년(강종 2) 음력 4월 10일에 현 설법전 뒷편에 세워지게 된 것이다.

 

 

 

- 비사리 구유 -

1724년 전라도 송동면 새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에 쓰러진것을 가공하여 만든것

밥을 저장하던 통이라한다.쌀7가마가 들어간다나....

사실은 싸리나무가 아니라 느티나무라는 사실...구유는 구시라는 말과 같은것으로

말이나 소의 먹이를주는 통을 말한다.

송광사 3대명물중에 하나이다. (3대명물-비사리구시,쌍향수,능견난사)

 

 능견난사 - 송광사에서 음식을 담는데 사용하던 그릇이다.
송광사 제6대 원감국사가 중국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며, 만든 기법이 특이하여 위로 포개도 맞고 아래로 맞춰도 그 크기가 딱 들어 맞는다고 한다.
조선 숙종이 그것과 똑같이 만들어 보도록 명했지만 도저히 똑같이 만들어 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눈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들기는 어렵다.”란 뜻에서 능견난사(能見難思)라는 이름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현재 송광사 박물관에 29점이 소장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가져온사진)

 

 

 

 

효봉영당/효봉스님사리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