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경상도

3영주 부석사-조사당

박근닷컴 2011. 5. 18. 23:28

 

 

 

 

무량수전옆 석탑에서 가파른 길을 100미터정도 오르면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두었다는 조사당이다.

 

 

 

조사당(국보제19호)

조사당 건물은 고려시대 맞배지붕으로 단아하다.

 조사당 건너편 응진전이있고 자인당이있다.

흙길을 돌아오르는 산책의 즐거움이 있는곳이다.

의상의 영정이 있다.

1916년 해체공사때 발견된 장여 위의 묵서에 의하면

조사당은 고려우왕3년(1377)에 원응국사가 재건한것이다.

 

조사당 내 벽화 : 국보 제46호

 

부석사에 전하는 벽화 6점은 원래 조사당 벽면에 그려졌던것이다.

일제 시대에 벽체에서 분리하여 무량수전에 보관하다가 현재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들은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범천, 제석천과 사천왕상을 그린 것인데 이 절의 창사주인 의상대사를 기린 조사당에 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를 외호하려는 의도로 제작한 듯하다.

크기 : 205.0 X 75.0 센티미터

 

 

 

 

 

 

 

 

 

선비화

 

 전설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하는말이"내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에 꽂아두고 갈것인데 이지팡이에서 잎이나서 살게될 것이다. 이나무가 살아있는한 내가 살아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천년이 지난 지금 지팡이는 아직도 살아있으니 의상대사는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
찾는 사람들이 동전을 자주던져 나무(골담초)가 수난을 당하자 촘촘한 쇠그물로 전체를 덮어 보호하고 있다한다.

 

 

 

 

 

자인당

 

선방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폐사지에서 옮겨 온 석불을 이곳에 이안하고

당호를 [자인당]이라고 고쳤다.

 

자인당 석불좌상

2구의 비로자나불상

이불상은 처음부터 부석사에 있던 것이 아니라

부석사 동쪽의 폐사지(동방사지추정)에서 옮겨 온 것이라한다.

자인당에 1구의 석불과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여러 형식들이 9세기 신라 하대 불상들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동편에 비로자나불

 

또한 두 불상의 양손이 다 깨어져 없어진 상태였는데

 가슴에 모은 팔과 손목의 위치로 보아 비로자나불로 추정

불상을 보수하면서 지권인의 수인을 만들어 붙였다고 한다.

서편에 비로자나불

 

 

동편

 

서편

 

동편 좌대

중대석에 천부보살상이 있다.

 

서편좌대

 

중앙에 석가여래불상

  2010년2월에 보물1636호로 승격

 이 삼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1.5km 지점에 위치하는 東方寺址에서 1957년에 옮겨 온 것이다. 이들 삼존 중 비로자나불 2구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20호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으로 지정되었다.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는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고, 보물 제220호와 같은 사지에 유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삼불(삼신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문화재청자료)

 

 

 

 

 

나한상을 모신 단하각

 

현재 건물 내부에는 손에 쥐를 들고 있는 작은 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정면에 걸린 현판의 [단하]가 무엇을 뜻하는 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리를 얻기 위하여 목불을 쪼개 땟다는 단하소불의 고사로 유명한 중국 육조시대의 단하 천연 선사를 모신 것이라면 선종과 연관이 있는 전각이라는 이도 있다.

 

 

손에 쥐를 들고있다...?

 

 

 

선종 사찰에서 그 종파를 연 조사祖師를 봉안한 절집이다. 

 

조사전이 없는 절에서는 영각影閣을 짓고, 국사를 배출한 절에서는 대신 국사전國師殿을 짓기도 한다.

영각을 지은 사찰은 그곳에 이름있는 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제의를 받든다.

교종이 소의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는 데 반하여, 선종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에 의지하는 바 크다.

법을 전하는 스승이나 전해 받는 제자나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으로 깨달음의 정도와 경계를 증명하고 인증받아 법을 전한다.

후일에 의발衣鉢을 전하는 제도나 인가의 제한이 사라졌지만, 처음에는 한 제자에게만 인가를 하고 그 징표로서 의발을 전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스레 생긴 것이 일종일파一宗一派 사자상전師資相傳의 기풍이며, 이 때문에 문중 스승에 대한 공경이 깍듯할 수밖에 없었다.

조사에 대한 존숭으로 부도浮屠[舍利塔]를 세우고 탑비를 건립하는 외에 사찰 경내에 따로 전각[조사전]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고 제의를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