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경상도

문학기행-(사천)다솔사

박근닷컴 2011. 6. 21. 21:17

 

사천 다솔사

경남 사천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이 주지를 살던 절이요,

그 무렵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야학을 열며 <등신불>을 집필하던 곳이다.

 

 

 

 

대양루

 

 

다솔사

 

 

봉황이 우는 터에 건립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에 있는 다솔사는

봉황이 노래한다는 봉명산이 뒤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고

차나무 군락지도 보이는 등 명당으로 불린다.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다.

 

 

 

신라 지증왕 때인 503년 영악대사가 영악사로 창건했다고 전해오기도 하고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지었다는 설이 있다.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으며 주민 대부분은 연기조사 창건설을 믿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8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그 뒤 자장율사(신라 선덕왕 5년)가

다솔사로 중건했다가 의상대사(신라 문무왕 16년)가 중창하면서

영봉사라고 이름 짓고, 고려 공민왕 때는 나옹선사가 다섯 번째 중건했으며

1914년 12월의 화재로 소실될 때까지 10여 차례나 중창됐다.

 

 

다솔사는 '봉황이 우는 산'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봉명산 기슭에 자리 잡았다.

삼족오, 꿩, 까치 등 새가 등장하는 비조문화가 발달한 우리나라에서

군왕을 상징하는 봉황을 이름으로 하는 산에 자리 잡은 사찰이 다솔사다.

많이 거느린다는 이름 때문인지 이 절에서 무슨 일을 도모하면

반드시 일이 성취된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인지 조선시대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왜군을 크게 무찌른 승병기지로 삼은 성지로서도 잘 알려졌다.

 

 

 

극락전

 

 

 

 

 

 

 

 

적멸보궁 사리탑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현판을 얹은 건물이 한 눈에 들어온다.

 

주지스님은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108과가 안치돼 있다한다.

설명을 들어보면... 

1979년 대웅전을 수리하던 중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부처님 사리가 발견되자

 대웅전을 개수해 통도사의 적멸보궁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발견된 사리는 적멸보궁 뒤편의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한다.  

 

 

적멸보궁내 종

 

 

 

 

 

 

 

 

 

 민족정신 일깨운 다솔사

 

 

 

다솔사는 만해 한용운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이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卍黨)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사찰 내 안심료(安心寮)는 만해가 머물면서 김범부, 김법린, 최범술, 문영빈, 오제봉, 설창수, 강달수, 이기주 선생 등과 교류하면서 독립선언문 초판을 집필한 곳이다.

 

 

또 소설가 김동리 선생은 안심료에서 등신불을 집필했다. 김동리 선생이 다솔사를 찾은 것은 1937년 봄. 김동리 선생은 다솔사 주지 효당 최범술 선생이 문맹퇴치를 위해 절 아래 마을에 세운 학당의 야학 교사로 합류했다. 이후 김동리 선생은 5년여 다솔사에 거주하며 마을 어린이와 여성, 심지어 머슴에게까지 우리글과 산수를 가르쳤다.

 

 

 

 

 

 

 

세 그루의 측백나무가 서 있는데, 회갑을 맞은 만해가 지인들과 함께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 인터넷 검색한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의 다솔사. 절 입구에 늘어선 굵은 소나무는 전장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장군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다솔사는 지금은 차로 유명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는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이었다.

왜구의 침략이 잦던 고려와 조선시대 때는 백성들에게 위안이 되는 사찰 기능만이 아니라 군사들이 주둔하며

말을 조련시키고 승병들이 무술을 익히며 훈련을 했던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다솔사에 들어가는 초입의 언덕길 소나무숲 사이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는 바윗돌이 있다.

조선시대 고종 임금 때 경상감사가 다솔사라는 명당에 선영을 안장하려하자 스님이 주민 탄원서를 임금에게 올려 분묘를 안치하지 말라는 어명을 받아 저지했던 징표다.

다솔사에서 원전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8㎞가량을 가면 세종과 단종의 태(胎)가 안치된 세종태실지(지방기념물 제30호)와 단종태실지(지방기념물 제31호)가 나온다.

 

태조는 왕비가 세종대왕을 낳자 태실도감을 설치하고 전국에 태를 안치할 좋은 곳을 찾다가 지금의 사천시 곤명면 은사마을에 어태를 안치했고, 세종대왕은 애지중지했던 단종이 태어나자 자신의 태실 곁에 단종의 태를 안치하도록 했다.

 

다솔사에서 사천읍 방향으로 지방도를 따라 6㎞가량을 가면 곤양면 흥사마을의 매향비(보물 제614호)가 있다. 자신의 소원을 적은 향나무를 강이나 바닷물에 잠길 정도의 위치에 묻고는 그 위에 내력을 새긴 돌을 올려놓은 것이 매향비다. 왜구의 창궐로 나라가 어수선하던 고려말에 세워진 것으로 주민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이곳은 모두 4100명이 계를 만들어 조성했는데, 당시 이 일대의 주민은 2000여 명에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