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하일라이트 돈황 막고굴로 간다...
거대한 흙산의 하층 부분이 막고굴이다.
‘돈황’은 고대어로 ‘성대하고 찬란하다’라는 뜻다.
막고굴은 실크로드의 하이라이트이다.
난주의 벽령사 석굴, 돈황의 막고굴, 투루판 화염산 아래 천불동 등은
불교의 동진 루트를 그대로 말하여 준다. 그 가운데서도 막고굴은 석굴의 조성, 불상,벽화 면에서 뛰어나다. 그래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돈황 막고굴 전경
막고굴은 돈황 시내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버스로 약 30분 거리에 있다. 물론 사막이다.
황량한 산 절벽에 막고굴이 있으며 그 앞에는 시내물이 흐른다. 물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에는
버드나무가 자란다. 절벽에 1층 2층 3층으로 동굴을 파서 석불을 모셨으며 큰 곳에는 1, 2, 3층을
관통하는 거대한 미륵불을 모시고 어떤 곳에는 와불을 모신 곳도 있다. 석불을 둔 굴 면에는 벽화
를 그려 두었다. 천정에 그린 벽화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그렸을가를 감탄한다.
막고굴은 전진 366년에 시작하여 원나라에 이르기까지 1600여년에 걸쳐 사막의 산절벽 면에 735개
의 석굴을 파서 거대한 미륵불을 세우고 석불을 조각하고 벽화 등을 그려놓았다.
특히 제17번 석굴에서는 당나라 때 신라의 승여 혜초가 돈황에 장기간 머물면서 쓴 '왕오천축국전'이
출토되었다. 왕오천축국전은 당시의 문물을 설명하는 여행기이다. 지금은 프랑스 루불막물관에 있다.
이 책은 프랑스 펠리오 신부가 17굴에 보존되어 있던 1만 여권의 고사본 더미에서 나왔다. 발견 당시
의 겉표지는 떨어져 나가고 속만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책은 혜초의 중국 제자가 축약한 내용이라고
한다.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130번 석굴의 벽화에는 신라왕자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전지를 비추어 그것을 보려고 애를 쓴다.
얼굴 형상으로 구별은 할 수 없고 머리에 쓴 모자로 구별할 수 있다고 한다. 꼬깔 같은 모자를
쓴 것은 신라 밖에 없기 때문에 신라 왕자라고 한다.
돈황(敦煌)은 한(漢) 나라 때 ‘모래의 마을이라는 사주(沙州)’로 불린 도시다.
천불동(千佛洞)이라고 하는데 감숙성 하서주랑(河西走廊) 서쪽, 돈황시 동남쪽에 자리 잡고 있고, 명사산 동쪽 산기슭의 50m의 높은 절벽에 층층의 동굴로 배열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전략적 요점에 위치해 있으며 동서방 무역의 仲介점이며 종교, 문화와
지식이 융합된 곳이다. 막고굴 492개의 석굴과 조각상, 벽화는 현재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제일 완벽한 불교
예술 보물창고이다. 용문석굴. 운강석굴과 더불어 중국 불교 3대 석굴중의 하나이다.
돈황 막고굴은 용문석굴보다 128년, 운강석굴보다 94년 앞섰다.
백양나무 숲을 따라 가면 입구가 나온다..
관람할 석굴은 한참 걸어 들어간다.
석굴관람에 손전등 준비하라고 했다면 이곳을 들어갈때 가져 가야한다.
석굴내 벽화를 전등으로 비춰불수있다.
이곳에서기념 사진을찍는다. 이후에는 카메라를 안내소에 맡겨야한다.
내부사진은 못찍게 하기위한 방책이다.
이곳 사진은 전부 외부에 남은 벽화나 외부모습이다 .
근데. .
우리끼리 폼잡고 사진찍을때 중국산 아저씨가 웃으면서 마구찍는다.
저 아저씨 뭐지? 했는데 나올때 찍은 사진을 인화해 팔고 있다.
기원 전 한 무제(漢 武帝)가 서역 경영에 나설 때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가 되었다.
돈황에 불교가 번지기 시작 한 것은 후한(後漢) 중기 때
이후 중국인들과 중앙 아시아인들이 마찰 없이 잘 지내면서 타림 분지에 번지던 불교도 번창했으나, 5호 16국을 거치면서 이 일대는 여러 민족 간의 다툼과 전란으로 얼룩졌다.
이 전란의 시기에 불교의 철학은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아 구원을 향한 불교 동굴 사원의 개굴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과 서역을 드나들던 대상들을 지원하던 재력가들은 석굴 사원을 만들어 부처님께 봉헌하고 상인들, 순례자들, 여행자들은
험난한 타크라마간 사막(塔克拉瑪干 沙漠)의 위험을 물리치고 무사히 여행하기를 기도하기 위해 석굴을 찾았다고 한다.
이후 북위(北魏)가 들어서면서 돈황도 그 영향권에 들었고(439년), 불교를 강력히 지지하던 왕조에 의해
중국의 3대 석굴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는 불교가 중국에 보급되는 초기였는데, 돈황은 그로 인해 서역에서 들어오는 수많은 불교경전, 불화, 문서 들을 수용하여
보급하는 불교의 포교지였으며, 중국에서 인도로 향하는 구법승들의 출발지 역할을 했다.
이후 토번(吐蕃, 7세기 후반), 위구르 왕국(911년), 서하 왕국(1036년), 몽골족(1227년)의 지배를 받았으며, 몽골 시대 때 동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슬람이 들어와 활발히 전해졌으며, 대부분의 이슬람 위구르 왕국들을 지배하던 차가타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슬람교도로 넘쳐나게 된다.
그 이후 모처럼 한족 왕국인 명(明) 나라 때는 가욕관(嘉峪關)의 성문을 닫고 폐쇄정책을 쓰는 바람에
장성 너머 돈황은 그다지 중요성을 띠지 못하게 된다.
실크로드가 개척되고 돈황은 서역(西域) 북로(北路)로 가던, 서역(西域) 남로(南路)로 가든 사막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쉴 수 있는
도시이며 전초 기지로서 각광받았다.
고대 중국의 국경 도시였기에 중국과 다른 나라가 만나는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장안(長安)을 떠나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장을 세운 후 기후, 적국의 상태 등을 파악한 후 남로나 북로로 갈지 결정하게 되었고
또 서역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중국의 첫 도시이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여기에 머물면서
장을 연 관계로 진귀한 물건과 돈이 넘쳐나는 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모래의 마을’에서 ‘성대하고 찬란한’ 마을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전성기 때인 당(唐) 나라 때는 아침, 낮, 저녁 등 세 번이나 장이 설 정도로 번성하였다.
유명한 막고굴(莫高窟)도 이 시기에 많이 건립되었다.
목숨을 걸고 사막을 건너야 할 당시의 상황으로, 인간의 두려움 등이 종교로 발전하였고, 그 여파로 이곳에 많은 종교 사원이 생겼다.
본래의 돈황은 지금의 도시에서 남서쪽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고, 지금 그곳은 전부 밭이고 흙으로 된 잔해들만 남아 있다.
현재의 돈황은 청(淸) 나라 때인 약 250년 전(1,725년)에 건설된 도시이다.
*막고굴(莫高窟)
다통(大同)의 운강 석굴(云崗 石窟), 루오양(洛陽)의 용문 석굴(龍門 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의 하나인 막고굴은 돈황하면 떠오르게 하는 석굴이다.
명사산(鳴沙山) 기슭에 있으며 동쪽 언덕을 따라 약 1,600m에 걸쳐서 5층의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언제부터 만들어 졌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돈황 연구원 발표에 의하면 진(秦) 나라 때인 서기 366년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원(元) 나라 때까지 약 1,000년에 걸쳐 만들어 졌으며, 1,000개 이상의 굴이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는 14굴에서 발견 된 ‘이회양중수막고굴불감비(李懷讓重修莫高窟佛龕碑)’의 비문 내용을 근거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는 당나라(698년) 때 이회양(李懷讓)이 석굴을 수리하면서 세운 기념비라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이 지역을 돌아다니던 낙준(樂樽)이라는 수도승이 명사산이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한 굴을 열었으며, 그때가 전진(前秦) 시대인 366년 이라고 한다.
그러나 낙준이 열었다는 굴은 보존되지 않고, 지금의 굴들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라고 한다.
돈황 연구원이 발표하기로는 현재 굴은 492개, 벽화는 약 45,000㎡, 불상은 약 1,400여 개가 발굴 되어 있다고 한다.
동굴별로 제작 시기가 거의 다 밝혀졌는데, 232개는 당(唐) 나라 때, 98개는 송(宋)나라 때, 79개는 수(隨)나라 때 만들어 졌고
제작 시기에 따라 벽화의 나타나 있는 복장 등의 생활 모습 등이 달라서 시대의 변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00년에 17굴에서 많은 경전과 문서들이 당시 도를 닦던 왕원록(王圓彔)에 의해 발견되었는데, 중요한 책과 경전, 자료 등은 외국인에게 팔고, 또 외국인들이 도굴해 가서 중요한 것은 거의 외국에 있다고 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당시에 발견되었는데, 이도 역시 그때 팔려서 지금은 프랑스 국립 박물관에 있다.
17굴에서 많은 경전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장경동(藏經洞)’이라고도 한다.
중국에 석굴 사원이 많이 지어진 이유는 인도의 영향이라고 한다.
인도의 건조하고 무더운 기후는 무척 덥다.
그런데 석굴은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철에는 따뜻하기 때문에 석굴을 조성하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는 석굴이 발달하였고, 이 영향으로 중국에도 불교가 전파되면서 석굴 사원이 많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인도의 불교가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 된 경로와 석굴의 이동 경로와 일치하며
즉 인도의 아잔타, 엘로라 석굴/-아프카니스탄의 바미얀 석굴/-중국의 키질 천불동/-돈황의 막고굴/-루오양의 용문석굴/-한국 경주의 석굴암이 불교 전파 시기와 100-200년의 차이를 보이면서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합니다.
막고굴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도 방대하다.
(단체사진-이정길선생님사진)
이것으로 사진은 찍지못한다 카메라 모두 보관소에 맡기고
해설사동방하여 두시간 눈으로 귀로만 보고들었다.
내부 벽화,불상 등은 도록으로 봐야한다. (거금을 주고 구입)
둔황 막고굴-발맛사지-유원으로 이동-저녁먹고 야간열차타고 투루판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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