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입니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오다 노부나가가 거의 전국통일 완성했고 오다의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좀 불안한 전국통일을 완성시켰습니다. 일본 다이묘 즉 지방영주에게 공급할 땅도 없었다. 개전초기 혹은 개전 전에 도요토미의 구상은 북경을 일본 수도로 삼는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자기 야망이였다. 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듯이 당시 일본상류층의 수요를 채우는데도 임진왜란이 한몫 했다. 대외적으로 즉 명나라를 정벌하러 가는 길을 내달라고 조선에 요구했는데 당시 조선은 명에게 형식적으로 속국이었습니다. 명에게 꾸준히 조공을 주었고,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때였다. 그런데 일본이 명나라를 공격하는 길을 내달라고 하였는데, 길을 내주기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 왜군의 침략을 받았을때, 조선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당시 붕당의 당파싸움에 의해 정치판은 어지러웠다. 군사 제도의 부패로 인해 국방력이 약하였으며, 사림세력들의 대규모 농장지배에 의해 백성들의 살림이 힘들었다.
- 조선의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
◎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
관군의 무능함으로 인하여 국토가 왜군에 의하여 짓밟히고 많은 생명이 죄 없이 쓰러져가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향리를 수호하기 위함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 의병의 활약
┕곽재우
그는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의령· 삼가· 합천· 창녕· 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 우도가 그의 보호 밑에 있었다. 또한 전라도로 향하는 적을 정암진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정인홍
정인홍은 의병을 모아 성주·합천·
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김면은 조종도· 곽준 등과 거창·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관군과 함께 지례에서 요격하여 격퇴시켰고, 무계에서도 승진하여 그 공으로 합천군수가 되었다.
┕김천일
김천일은 나주에 있다가 의병을 일으켜 수백 명을 이끌고 선조가 피난한 평안도로 향하다가 강화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적의 점령하에 있는 도성에 결사대를 잠입시켜 백성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얻었으며, 한강변의 여러 적진지를 급습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영규
의승장 영규도 조헌과 함께 진격하여 금산성에 육박하였어요. 적군은 후속 부대가 없음을 알고 조헌이 채 진영을 정돈하기도 전에 전병력으로 공격해왔다. 조헌이 이끄는 의병들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적을 맞아 싸웠대요. 그러나 끝내는 조헌 부자와 영규 그리고 의병들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순신-
이순신 장군은 4차(17회)에 걸쳐서 큰 해전을 하셨다고 한다.
1차 출전 전과-
참전전함은 조선이 27척 일본가 53척. 전사자는 일본만 6290여명 이였다. 부상자는 조선 2명. 일본은 거의 반 이상이였다고 한다.
2차 출전 전과-
일본만 69척의 배가 바닷속으로 침몰하였다. 전사자는 조선 11명. 일본은 10120여명이 바다에서 익사했다고 한다. 부상자는 50여명이고, 이순신장군도 포함하였다. 일본 대체로 모든 병사들이 중상을 당하였다.
3차 출전 전과-
일본은 59척(주력전함 35척 포함)이였다. 전사자는 조선은 약간. 일본은 8980여명으로 400여명이 도망쳤으나 모두 죽고 190명만 간신히 살아서 돌아갔다.
4차 출전 전과-
일본의 배가 100여척 파괴하였고, 전사자가 조선 6명, 일본이 3800명이라고 한다. 조선은 부상자가 역대 가장 많은 25명이였다고 한다. 출전함대는 대략 〈조선 1 : 일본 7〉의 비율 이였다. 조선 해군은 이순신 장군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남해안의 해권을 장악하였다. 임진년 5월 4일, 제 1차 출전 이래 총 4차에 걸쳐 17회의 크고 작은 해전을 전개하여 적선의 격침, 나포가 207척이었고 일본 적선은 152척이었다. 또 왜병 33,780명을 바다로 수장시켰다. 이에 비해 조선 해군은 단 한 척의 전선 손실도 없었고, 인명 손실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모두 합하여 243명에 그쳤다. 해선 격침 및 대파 : 359 대 0 >>사상자 : 33,780 대 243.
- 임진왜란을 극복할수 있었던 이유
우리민족의 저항 정신으로 극복해냈다. 특히 의병의 활동으로 관군이 힘을 얻어 이겨낸 전쟁이다. 특히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들이 합심하여 관군을 도왔다.
지리에 밝은 향병들이 지방에 살면서 지리적으로 밝은 의병들이 유인 작전으로 승전하게 하게 되었다.
또 동부아의 힘을 과시하고 있던 명나라가 조선의 편에서 도움으로서 일본의 정치 외교상에서 분리하고 군사력의 약화로 조선이 이길 수 있었다.
또 일본의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바다를 건너서 싸움을 해야 하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본토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하여 결국 전쟁에서 일본이 지게 되었다.
7년간의 전쟁에서 일본의 장거리 전쟁에서 많이 지친 병사들은 조선에 투항까지 하는 상황까지 가게 되어 결국은 일본이 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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