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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4조선일보] 신라 고분에서 광개토왕 추모 기념품이

박근닷컴 2012. 11. 23. 00:15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
신라 고분에서 광개토왕 추모 기념품이…고구려에 인질로 간 내물왕 아들이 가져와

 


양국 교류 보여주는 5세기 희귀 명문(銘文)자료1946년 4월의 마지막 날, 서울을 출발한 미군 트럭 한 대가 경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 조수석에는 국립박물관의 서갑록 연구원이 타고 있었고, 짐칸에는 낡은 측량도구와 발굴에 필요한 장비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이들은 그 전해 광복을 맞아 출범한 국립박물관의 첫 발굴을 위해 역사적인 발걸음을 내디딘 것이었다. 같은 날 김재원 박물관장과 함께 기차 편으로 서울을 출발한 3명의 조사원은 다음 날 경주에 도착했다. 그러나 장비를 실은 트럭은 도중에 고장이 나서 사흘 만인 5월 2일에야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조사원 가운데에는 이제 막 40대에 들어선 일본인 한 사람이 끼어 있었다. 총독부박물관 근무를 포함하여 15년 남짓 우리나라에 머물렀던 고고학자 아리미쓰(有光敎一)였다. 그는 박물관 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한국에 남아 있다가 발굴현장까지 동행한 것이다. 국립박물관 직원 가운데는 발굴 경험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자구책이었다. 그는 흡사 포로나 인질 같은 입장이었으나 올곧은 학자적 양심으로 발굴을 성실히 돌봐준 뒤 발굴을 끝내고 부산을 거쳐 귀국했다.

역사적인 첫 발굴 대상으로 선정된 '호우총(壺杅塚])'은 경주 시내 곳곳에 나지막한 언덕처럼 솟아있는 고총(高塚) 가운데 하나로 당초 '노서동(路西洞) 140호 무덤'으로 알려졌다. 이 무덤은 이 지역 대다수의 왕릉급 고분과 같은 대형의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남쪽의 은령총(銀鈴塚)과 함께 표주박 모양의 쌍분(雙墳)을 이루고 있었다.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 조사에서 출토 된 호우. 밑바닥에 ‘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16자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다.‘ 호우’라는 명칭은 이 명문에서 비롯됐으며, 무덤의 이 름도 호우총으로 붙여졌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그해 5월 한 달을 다 채운 조사 결과는 첫 발굴치고는 대단한 학술적 성과였다. '호우총'이라는 이름은 많은 부장품과 함께 출토된 합(盒) 모양의 청동제 호우(壺��)에서 비롯되었다. 그릇 밑바닥에 새겨진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호우십·乙卯年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壺��十'이라는 16자의 명문은 이 유물의 제작지가 고구려임을 알려주었다. 여기서 을묘년은 광개토왕의 사후(死後)인 장수왕 3년(서기415년)이다. 이 호우는 광개토왕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수한 기념품이었던 것이다.

5세기경 고구려 유물이 신라 수도 경주에서 출토된 사연은 무엇일까. 당시 이 발굴을 직접 지휘한 김재원 관장은 이 특이한 호우가 광개토왕 때 고구려에 인질로 머물렀던 신라 내물왕의 아들 복호(卜好)가 귀국할 때 가져온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삼국 간에 이루어진 교류의 흔적을 물증으로 보여주는 희귀한 명문(銘文) 자료였던 것이다.

호우총 축조 시기는 돌무지덧널무덤의 마지막 단계인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출토된 호우는 약 100년 남짓 전세(傳世)되어 오다가 무덤 주인과 함께 묻힌 것이다. 호우총 발굴은 해방 후 출범한 국립박물관이 우리 손으로 이뤄낸 첫 발굴이자, 그 뒤에 이루어진 삼국시대 고분 연구에 시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박물관 100년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다.

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