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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박근닷컴 2011. 10. 24. 15:55

 청동기 시대

(1) 청동기 시대의 유물과 유적
1) 시기 : B.C. 10 세기경부터 시작
2) 유적 : 남만주와 한반도에 걸쳐 독자적인 문화권 형성
(고인돌, 돌널무덤, 선돌)
3) 유물
① 청동기 : 동검(비파형 → 세형), 청동 거울(거친무늬 → 잔무늬)
② 토기 : 민무늬 토기
③ 간석기 : 반달 돌칼, 돌갈판 등

(2) 청동기 시대의 사회 생활

1) 농업의 발달 : 벼농사의 시작
2) 움집의 발전 - 야산이나 구릉 지대, 지상 가옥, 취락 형성
3) 정치적 사회의 성립과 군장의 출현
① 군장의 출현 - 권력 강화, 재산 축적
② 제정 일치 - 정치적 지배자,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군장

4천년 정도 존속했던 신석기시대는 북방에서 새로 들어온 청동기문화에 의하여 서서히 그 막이 내리게 됩니다. 청동기문화란 지금까지 인류가 사용한 도구의 재료가 석기(石器)에서 금속(金屬)으로 변화하는 첫 단계의 문화입니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인류가 처음 도구로 사용한 금속은 청동기가 아니라 구리(銅/copper)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북부 이라크지방에서 기원전 7천년 경부터 구리를 처음 사용했는데, 아시다시피 구리란 매우 부드럽고, 반짝이는 붉은 색은 보기에도 좋은 금속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구리의 특성을 이용하여 간단한 도구로 두드려서 혹은 펴서 장신구나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습니다(이를 냉동법 /冷銅法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분명히 신석기시대의 초기에 해당하며 일부지역에서만 구리의 이용방법을 알았고 또 이를 실생활에 사용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시대를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Aeneolithic Age) 혹은 순동시대(純銅時代/Copper Age)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한반도에도 금속병용의 시대가 있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습니다만 청동기의 사용은 수많은 유물들에 의하여 확인되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청동기는 북방 시베리아 계통의 청동기가 한반도에 전래되었는데, 이 청동기는 계통상 중동지방의 청동기와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청동기 유물은 기원전 3700년경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렇게 볼 때 아마도 구리라는 금속의 사용이나 청동기의 사용도 현재의 중동지방이 인류 역사상 가장 빨랐던 것 같습니다. 이 지방의 청동기 제작 기술이 지중해를 건너 로마로,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서 서서히 동진하여 우랄산맥을 넘어 지금의 바이칼호수 주변까지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고 있었던 유목민족들에 의하여 청동기 제작 기술은 서서히 주변지역에 전파되기 시작했는데, 아마도 이곳의 유목민족들 중의 한 지파에 의하여 한반도에 청동기가 전래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마도 이시기는 기원전 10세기를 전후한 때로 짐작됩니다.

당시 우리와 이웃한 중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인 기원전 2000년경에 청동기문화가 자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계통상 한반도의 청동기문화와 연결된다는 증거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말하자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중국계통이 아닌 시베리아 계통의 청동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동기의 제작 기술은 북방시베리아 계통의 문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우리 조상들은 이 기술을 이용하여 곧바로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청동기 초기 유물중의 대표적인 유물의 하나라 할 수 있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이나 다뉴조문경(多 粗文鏡)의 발견지역이 만주와 한반도 일대에 국한되고 있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독자적인 청동기문화를 형성했다고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또한 한반도 각지에서 청동제품을 만든 용범(鎔范, 거푸집)이 발견되는 것도 독자적인 청동기문화의 존재를 말해주는 증거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앞에서 미리 언급 못했는데, 그렇다면 청동기는 어떻게 만들지요? 청동기 제작의 기본이 되는 금속은 물론 구리입니다. 그런데 구리에다 어떤 특정 금속을 합금하면 구리보다 훨씬 단단하고 모양도 아름다운 금속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인류가 알았습니다. 보통은 구리 97%+주석 3% 혹은 구리 90%+비소 10%, 구리 55%+아연 45%를 합금하면 청동(bronze)이 됩니다. 그런데 아연합금의 경우 아연의 비율이 45%를 넘으면 청동이 아닌 놋(brass)이 만들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 사용한 놋그릇의 재료가 바로 이것입니다.

청동기인들은 골고루 퍼져서 살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고, 주거지의 앞에 있는 평야지대에서 농업을 위주로 한 생업경제를 꾸려가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주로 발견되는 토기는 흔히 <무문토기>로 단일화된 듯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외형에서 보이는 토기의 색깔이 적갈색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그 형태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고, 지역에 따라서도 형태에 차이가 많이 남을 알 수 있습니다. 무문토기가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출토된다는 점은 바로 이 시대의 농업경제가 그만큼 안정되고 복잡하였다는 것을 반영하는 증거라 하겠습니다.

무문토기와 함께 출토되는 유물로는 반달모양의 칼(半月形石刀)이나 농기구 등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또 드물기는 하지만 탄화된 곡식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농경의 시작을 확실히 증명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가 청동기시대라고는 하지만 청동 제품은 여전히 귀해서 일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던 청동기시대인들의 주거지는 신석기와 마찬가지로 아직까지는 움집에서 살았습니다. 물론 신석기시대에 비해서는 한단계 발전된 형태의 움집에서 거주했었지요. 원형의 움집이 장방형으로 바뀌어 진다든지, 움집의 깊이가 보통 50cm 전후로 점차 얕아지고 있는 점이나, 넓이도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점들의 차이가 있습니다. 움집에서 지상가옥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겠지요

움집은 아주 넓은 것도 발견되기는 합니다만 평균은 20㎡정도의 넓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움집의 내부 구조는 신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남녀공간이 구별되어 있었습니다만, 화덕이 움집의 중앙이 아닌 한쪽으로 치우쳐져 발견된다든지, 움집 벽을 밖으로 돌출시켜 만든 곳에 저장공을 둔다든지 하는 차이가 발견됩니다. 특히 넓이가 넓은 움집의 경우 내부 공간을 칸막이로 나누었다든지, 기둥을 세울 때 원시적인 형태이기는 하지만 주춧돌을 사용했다든지 하는 점은 신석기 시대와 비교하여 큰 변화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농경이라는 생업경제의 영향으로 한 곳에 오래 머물 필요가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반영하듯 움집들이 비교적 넓은 장소에 걸쳐 집단으로 몰려 있다는 점은, 어쩌면 <국가의 발생>이라는 큰 변화를 보여주는 전조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는 발굴된 움집 자리 중에서 화재의 피해를 입은 집자리터가 자주 발견된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단순한 화재로 집이 불타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청동제 무기로 무장한 어떤 집단과의 정복전쟁의 결과로 불타버린 것일 수도 있다는 짐작을 가능케 합니다. 정복전쟁의 시작도 역시 국가 발생의 전단계로 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