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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문화

박근닷컴 2011. 10. 24. 16:39

신석기 문화
기원전 1만 6천년 무렵에 최고조에 달한 빙하기의 추위가 기원전 1만년 경을 전후하여 물러가고 따뜻한 기후가 시작되자 지구상에는 앞 시대의 구석기인과 다른 새로운 인류가 등장하였다. 신석기인들이 출현한 것이다. 현생인류(現生人類)는 이들에게서 비롯하였다. 신석기인은 자연물을 가꾸고 길러서 식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인류라는 점에서 자연물을 채집하여 먹고 산 구석기인과 구별된다. 신석기문화는 식량생산인의 문화이며, 예리하게 가공하여 만든 석기를 사용한 마제석기인(磨製石器人)의 문화이고, 불에 구운 단단한 토기를 제조하여 사용한 토기사용인(土器使用人)의 문화이다 .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의 식량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은 기원전 7천~6천 년 경의 중동아시아라고 한다. 우리 나라 신석기 문화의 주인공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즐문토기인(櫛文土器人)들로, 즐문토기는 서방 핀란드에서 서북 러시아․시베리아를 거쳐 만주와 한반도까지 널리 출토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즐문토기가 시베리아 즐문토기문화에 속하는가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견해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으나 넓은 의미에서 우리 토기의 출발점을 시베리아의 즐문토기문화권에 두는 것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기실, 시베리아를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면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는 그 계통조차 이해할 수가 없게 되는 형편이다. 시베리아지역에서 남하한 고(古)아시아족(Paleo-Asiatics)이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의 주인공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고 평가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베리아의 고아시아족이 그들의 조상으로 곰을 숭배한 사실도 단군신화와 관련하여 이 견해를 뒷받침하는 요소이다. 우리 나라에 신석기 주민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시기는 중국 황하유역에서와 비슷한 기원전 5~4천 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신석기인들은 처음에 강가나 해변에 취락을 이루고 수렵이나 어로에 종사하면서 살았다. 한반도에서의 대표적인 즐문토기 출토지가 두만강․압록강․대동강․한강․낙동강 하류지역과 서해안의 도서지역 및 동해안에 집중되어 있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또 이 시기 즐문토기의 바닥이 뾰죽하거나 동그란 도토리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그것을 사용한 사람들이 강변이나 해변의 모래와 같은 연약한 토질 위에서 살았음을 말해준다. 땅에 쉽게 꽂아서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토기의 바닥을 굳이 평평하게 만들 필요가 없었다. 신석기인들의 수렵․어로 활동은 구석기인과 다른 여러 가지 도구를 이용하여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후기구석기시대부터 쓰기 시작한 활과 화살이 신석기시대에 들어서서는 형태면에서 정형화되고 종류면에서 다양화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무렵에는 부분적이나마 사회분화가 진행되어 이러한 도구들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났던 것 같다. 신석기인들은 활을 이용하여 날쌘 길짐승과 날짐승까지 잡아 식량으로 쓰거나 털과 가죽을 얻었다.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를 보면 포유류와 조류가 각각 20여 종에 이른다. 또 작살이나 찔개살․낚시․그물 등을 만들어 어로에 이용하였다.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유적에서는 70여 개가 넘는 결합식 낚시가 발견되었으며, 부산의 동삼동유적에서는 그물이 찍힌 토기가 발견되었고, 그물에 매달아 사용한 그물추는 유적마다 발견되다시피 한다. 이 시기에 식량으로 사용된 식물로는 도토리가 주목된다. 타닌(Tannin)에서 나오는 떫은 맛이 있으나 칼로리와 영양가가 곡물 못지 않은 식품이다. 따라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우려내거나 했다면 훌륭한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토기도 그 처리 과정에서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견해도 있다. 도토리나 과일류와 같은 나무열매뿐 아니라 토란․마․칡 등 근경류(根莖類)도 식량으로 쓰였다. 신석기인들은 기원전 3~2천 년 무렵에 야생동식물의 채집에 의존해 온 생활형태에서 벗어나 가축을 기르고 경작과 재배를 통해 곡식을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주거지도 구릉지대로 옮겼는데, 후기 즐문토기의 바닥이 평평해지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수반된 사실로 생각된다. 피․조․기장․수수 등이 이 때에 주로 경작되던 농작물이었다. 황해도 봉산군의 지탑리유적 Ⅱ지구 2호 움집터에서는 조로 보이는 탄화곡물 3홉 정도와 돌보습․돌낫 등의 농기구가 수습되었다. 탄화된 조는 같은 봉산군의 마산리 7호 주거지에서도 출토되었는데 이들은 기원전 4~3천 년 경의 유적으로 편년되고 있다. 늦어도 이 무렵에는 조 중심의 밭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보아 큰 무리가 없겠다. 북한에서는 신석기시대 초기 단계부터 농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고 한다. 벼농사와 관련해서는, 한강 하류의 김포와 일산의 토탄층에서 기원전 2천 년 무렵의 볍씨들이 잇따라 발견되었다. 일찍이 경기도 우도패총에서 나온 토기 밑바닥에 볍씨 자국이 있어 신석기시대 후기 도작농경설(稻作農耕說)이 제기된 바 있었는데, 최근의 이 발견으로 한층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시기를 둘러싸고는 여전히 청동기시대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형편이다. 신석기시대의 농경은 주로 괭이농사로 이루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괭이농사에서 보습농사로 진전되었으며 보습이 나중에 쟁기로 발전한다고 하나 아직은 가설의 수준이다. 신석기인들은 여러 가족이 혈연을 매개로 모여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 마을의 성격은 그 내부의 남녀 간에 결혼을 허락하지 않는 씨족취락이었을 것이다. 족외혼의 단위인 이들 씨족공동체는 그 내부에서 생산수단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노동하며, 그로써 얻은 생산물을 공동분배하는 평등사회였다. 물론 씨족장이 있었고, 그는 여러 가지 결정권을 행사하였지만 지배자나 권력자가 아니었다. 계급이나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 평등 사회에서 씨족장은, 마치 우리 가정에서의 아버지처럼, 사회생활과 경제생활의 지도자일 뿐이었다. 하나의 씨족이 존재하였다는 것은 곧 그와 족외혼을 하던 다른 씨족들이 근처에 더 존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사이에는 혼인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생산물의 교환 등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도 일정한 교류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겠다. 따라서 씨족사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지연적인 성격을 띤 부족사회가 동시에 존재하였음을 의미한다고 보아도 좋다. 흔히 씨족사회에서 부족사회로의 발전을 말하는데, 이는 처음에 씨족만 존재하다가 나중에 부족이 등장하였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운영의 단위가 씨족 중심에서 부족 중심으로 확대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신석기인들은 어떤 특정한 동물을 그들의 공동 조상으로 생각하고 이로써 다른 집단과 스스로를 구분하였다. 조상으로 숭배된 동물을 토템이라 하며, 토템 숭배 사상을 토테미즘(Totemism)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의 신석기인들이 널리 숭배하던 토템은 곰과 호랑이였다. 또한 신석기인들은 산․바다․나무와 같은 자연물을 포함한 우주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정령신앙(精靈信仰=Animism)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쉽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자연물 각자에 의지를 부여하고 그들을 숭배함으로써 재난을 피하려 하거나 풍요를 기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의 불멸을 믿었다. 신석기시대의 무덤을 발굴해 보면 시신의 머리를 의도적으로 동쪽으로 향하게 한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늘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영혼의 소생처(甦生處)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즐겨 사용하거나 아끼던 물건을 함께 묻는 풍습이 있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영혼불멸의 신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석기인들은 삶의 세계와 죽음의 세계를 구별하고 광명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구별하며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을 구별하는 등 만물의 질서를 이원론적(二元論的) 입장에서 파악하고, 양자를 매개하는 존재로서 주술사 혹은 무당을 설정하여 섬겼다. 무격신앙(巫覡信仰)이다. 부산 동삼동유적에서 출토된 조가비가면은 주술사가 악귀를 쫓는데 사용하던 물건일 것이다 . 무격신앙은 세계 어디서나 흔히 발견되지만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발달하였고 이 지역에서 주술사를 Shaman(샤먼)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를 믿는 사유형태를 Shamanism(샤머니즘)이라고 부른다. Shaman은 단순한 주술사가 아니라 중요한 일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정치적 지도자이기도 하였다. 이상 한반도의 원시사회의 사회상에 대해 개략적인 사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한반도에서 출토된 신석기유적을 우리 나라 신석기문화 및 그 시대상을 조망하는 자료의 전부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고조선이 성립한 지역이 한반도에서 멀리 떨어진 난하(河)와 대능하유역이었던 사실에서 명백하듯이 이 시기 우리 민족사의 중심 무대는 한반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